목요칼럼-나도 '과보'가 아닌지…

입력 1999-02-25 14:42:00

옛 사람들은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건너뛰지 못할 개울은 돌아가라'고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속담들이 과연 얼마나 먹혀들까.

허망한 꿈 깨지기 마련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오르지 못할 나무가 어디 있으며, 다리를 놓으면 못 건널 개울이 어디 있느냐고 일축해 버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같은 세태는 정말 걱정이다. 탐욕은 허욕에서 비롯되고, 허욕은 허세를 낳으며, 허세는 허망한 꼴을 부르는 것은 뻔한 귀결이다.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編)'에는 '과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해를 따라가 잡아쥐겠다고 해 그림자를 좇았다. 그 길 위에서 하도 목이 타서 황하(黃河)의 물을 다 마시고, 위수(渭水)의 물마저 다 마셨다. 그런데도 목마름은 마찬가지였다. 북으로 달려가 더 큰 못의 물을 들이켜려 하던 그는 도중에 목이 타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반면 그가 땅에 던진 지팡이는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어 잎이 무성한 나무로 자랐다. '과보'의 살과 피가 거름이 돼 그 나무는 날로 번성했으며, 이윽고 수천리나 되는 숲(鄧林)을 이루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욕망의 성취에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인간의 탐욕이 어떠한 결말을 부르게 되는지 살펴보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뇌물 등 돈 받아 챙기기 문제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탐욕에 마음의 눈이 멀어 각계각층이 '뇌물 면역증'에 걸린 느낌마저 든다. 어느 곳 하나 냄새가 나지 않는데가 없을 지경이다. 심지어 법적인 문제가 돼도 '다들 하는 일이고 지금까지의 관행인데 우리만 왜 문제 삼느냐'는 식으로 되레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았다.

일상이 돼버린 부패

도덕성이 마비되고, 부정부패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 있으므로 뇌물 문제로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조차 많은 것 같지 않고, 이런 비리(非理)들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어지러울 정도다. 더구나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불신감만 더해준다는 반응도 따르는 세태다.

달도 차면 기울고 활짝 핀 꽃들이 시드는 것은 진리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도 이젠 썩을 대로 썩었기 때문에 다시 깨끗해질 수는 없는지, 그런 기대감을 갖는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욕심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

더러운 물과 맑은 물이 함께 흐르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 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큰 흐름이냐'가 문제다. 큰 흐름은 작은 흐름을 빨아들이고 동질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도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오늘의 큰 흐름은 과연 어느 쪽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비참해지기만 한다.

정치권은 물론 우리 모두가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볼 필요도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 탓'이 없는가를 들여다보는 겸허한 마음과 탐욕 지우기에 마음의 눈을 뜬다면 우리 사회는 맑고 밝으며, 살만한 곳이 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자기 합리화로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그 흠집만 후벼파는 '과보'가 우리 정치권의 초상이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는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자신도 너무나 이지러지고 작아보여 참담할 따름이지만….

봄이 오고 있는데 진정한 봄은 오지 않을까 조바심하는 새봄의 길목에서 부질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떤 상황에 놓여서도 마음을 낮춰 자신의 일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생각도 새삼 해본다.

제자리부터 찾아야

모든 사람들이 '과보'가 되기를 거부하고 제자리로 돌아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기 일에 충실할 때, 그런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지고 힘을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때,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삶 자체의 가치에 눈을 뜨고 그 자체를 보다 귀하고 아름답게 창조해나갈 때, 오늘의 이 암울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이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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