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0년전만해도 인도와 같은 특수한 사례를 빼면 제3세계에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는거의 없었다.
당시 정치학 연구자로서 첫걸음을 시작했던 필자는 기존의 세계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않는 한 제3세계의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제3세계 국가들의 억압체제는 세계 규모의 정치·경제체제의 '군사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하기때문이었다.
예컨대 한국의 사례를 들면 한·미관계나 한·일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변혁을 포함한 한반도의통일이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된 한국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개혁없이는 민주화를 이루어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국가들의 정치체제를 둘러싼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70년대 남부유럽국가들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중남미, 동남아지역의 많은 국가들에서 기존의 권위주의체제가 민주화됐다.
한국도 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민주화로의 이행을 개시했다. 나아가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민주화의 물결은 중동구의 공산권 국가들까지도 휩쓸었다. 또한 종전에는 민주화와 가장 거리가멀었던 아프리카지역 국가들도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해서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됐다.
이처럼 민주주의체제가 제3세계를 포함, 거의 전세계 규모로 보편화돼가는 현상을 사무엘 헌팅턴은 민주화의 제3의 물결로 말한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제3세계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화되는 것은 국제체제 그 자체가 크게 변동했기 때문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하는 의문이다. 전두환 정권에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미국 레이건 정권이 87년에는 민주화를 지지했던 것처럼, 그때까지만해도 권위주의체제를 뒷받침했던 국제적 조건들이 거꾸로 민주화를 촉진시킨 외압으로 작용한 사례들은 드물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로 IMF(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에 의한 구조조정 정책 패키지로 정치적 민주화가포함됐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종전의 IMF, 세계은행이 구조조정 정책을 신속히 밀고 나가기 위해 민주주의체제보다 권위주의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커다란 변화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이 문제에관해서는 냉전체제가 종식됐다는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3세계를 둘러싼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하며 그것을 제약해왔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아직까지 강력하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만해도 제3세계의 민주화에 제동을 거는 조건이라고 평가받았던 것들에 큰변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 민주화를 둘러싸고 긍정적 평가뿐만 아니라 회의적이고 냉담한 반응도 함께 공존한다. 민주화된 것 자체는 좋지만 과연 민주화됨으로써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제기된다.
이는 민주화에 관련된 정치 행위자들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구조적 조건들의 변화를 어떻게인식하느냐 하는 '구조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바람직한 민주화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그리고 그것과 민주화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가치판단이 크게 달라지는것이다. 민주주의론은 서로 다른 민주주의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입장은 민주주의의 '보편주의파(普遍主義派)'이다. 서구적 의미로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전제로, 이와 합치되지 않는 체제에 대해서는 이질적인 가치관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려는 것이다.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의 종언'이라든가 헌팅턴이 말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것은이와같은 견해를 대표한다.
사상이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도 이것이 민주주의 체제로서 제도화됨으로써 비로소 유효하다고본다. 제도화된 민주주의 체제를 어떻게 '방어'할수 있느냐가 최우선 과제인만큼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사상이나 운동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두번째 입장은 민주주의의 '심화주의파(深化主義派)'이다. 데이비드 헬드 등이 말하는 '지구 민주주의' '급진 민주주의'라는 개념들이 이와같은 사상적 조류를 대표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실질적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입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상 내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상대화하려는 것이다.
비록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체제가 확보돼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고 '영구 혁명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입장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촉구하려는 것이다.민주주의의 심화는 일국 단위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리를 세계정치에도적용하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세계화를 지향함과 더불어 국가권력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의 민주화까지도 지향한다는 두가지 방향을 설정한다.
이 양자를 결합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세계화'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며 이것은 시장경제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구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보편주의파'가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틀속에 머무른데 반해 '심화주의파'는 민주주의를 사상면에서 '혁신'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의욕이 지나치게 야심적인만큼 오히려 그 담당세력들을 찾기가 힘들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들은 체제와 사상이라는 다른 차원의 논의에 머무르고 있을뿐 접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그래서제3의 입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중층주의파(重層主義派)'라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중요시하는견해가 등장하게 된다. 주로 제3세계에서 진행되는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이 이러한 민주화운동을 담당하고 있다.
이같은 운동들은 시장경제의 세계화와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경제위기에 적응하면서도 동시에 저항한다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체제화'를 강요당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운동으로서의 약체화를 피할 수 없게 되는 어려운 처지에 직면해있다. 그러나 방치되는 '시장의 폭력'으로부터의보호기능을 기존 국가들이 포기하다시피하는 가운데 민주화운동들의 역할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이같은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협력, 경쟁하면서 중층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운동을 사상적으로도 심화시킴과 더불어 적어도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제어'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체제화도 지향해야 한다는 과제를 지닌다. 운동을 중심으로 사상,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더 한층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일이야말로지금 가장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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