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질녀는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고를 적마다 늘 당황한다고 한다. 모든 상품의 표시가 영어로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전통적 선비인 할아버지는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문만 가르쳤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를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와서 퀴즈를 풀고 있었다. 이분들의 입에서 '아이엠에프'라는 말들이 서툰 발음으로 마구 튀어나왔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같았다.
사실 해방후 서구 문물이 밀려들면서 우리의 생활속에서 외래어들이 마구잡이로 사용되었다. 그침투력은 너무나 강렬하여 간판 상표만이 아니라 생활용어에까지 스며들었다. 주로 미국 유학생출신들은 언론매체에 논설이나 시사관련의 글을 쓰면서 외래어를 남용하였고, 문인들은 덩달아수필같은 글을 쓰면서 외래어로 덧칠하며 멋을 부렸다.
이런 현상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박정희정권은 보다 못해 외래어 간판을 한글 이름으로 바꾸게 하는 따위 물리적으로 이를 시정하려 들었다. 조금 국수주의적 분위기는 풍겼으나 그리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근래에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시간대에 따라 알려주는 텔레비전 뉴스의 제목이 '뉴스 파노라마'니 '굿모닝 코리아'니 하는 따위로 거의 우리말을 쓰지 않는다. 다른 프로의제목에도 거의 이와 비슷하였다.
더욱이 잡지의 이름을 원어로 표기하여 그대로 써서 내걸고 있고, 신문의 특정란의 이름에 원어를 그대로 써서 내보낸다. 병원 의원은 어느새 '호스피털'과 '크리닉'으로 둔갑하였다. 그래서 만주땅의 조선족들은 고국에 와서 이런 용어를 알아먹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내 질녀보다 훨씬언어의 장래를 일으키고 있다. 국제구제금융시대가 오기전에 먼저 언어의 제국주의 시대를 겪었다.
나는 결코 외래어를 전혀 쓰지 말자거나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비행기로 하루면 미국이고 유럽이고 날아가는 지구촌시대에, 또 컴퓨터로 아프리카와 대화를 나누고 무수한 정보를 입수해야 하는 현실에서 더 많이 더 능숙하게 외국어를 배우고 구사할 줄을알아야 할 것이다.
또 새로운 개발에 따른 전문용어도 써야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 전시대(電視臺)라 하지 않고 '텔레비전'이라 쓰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이엠에프'는 직역해서 '국제금융기금'이라고 하든지 의역에서 '구제금융시대'라면 알아듣기 쉽고 듣기에도 부드러울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속에서 아무 절제없이 외래어를 남용하면 의식의 왜곡을 가져온다. 우리 역사에서 그동안 한문용어를 많이 쓰면 유식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 고착되어 왔다. 대중들이 미국의 저질 영화를 많이 보면 미국상품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변화를 보인다. 어떻게 적절하게 외래어를 써서 언어생활을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느냐는 현실적 과제가 떠오른다.
여기에서 하나 제의를 하면 불가피한 외래어를 쓸 적에 가급적 한글 표기를 하고 필요에 따라 원어를 명기해도 좋을 것이다. 언론매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청소년들이 가슴에 '유니언 잭'이 그려진 웃옷을 입거나 영어로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글귀가 쓰여진 옷을 입지 않을것이다. 청소년들은 극심하게 언어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또 해방후 최대의 위기라고 떠드는, 구제금융시대의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용어를 우리말에 맞게 사용하는 일 자체가그 위기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다. 그래야 우리 것은 보잘것 없다는 의식의 혼란을 가져오지 않고자기 가치관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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