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 누구인가

입력 1998-08-04 14:52:00

15대 국회 후반기 의장에 선출된 자민련 박준규(朴浚圭)최고고문은 의장을 두번이나 역임한원내 최다선(9선) 의원이다.

자유당 시절 조병옥(趙炳玉)박사 비서를 지낸 박의장은 지난 60년 4.19직후 치러진 5대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이래 11, 12대를 제외하곤 내리 당선, 9선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4.19직후 젊은 김영삼(金泳三)의원 등 민주당 구파 소장의원들과 함께 청조회(靑潮會)를 결성, 정풍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5.16이후 김종필(金鍾泌.JP)씨의 손에 이끌려 공화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79년에는 공화당의장서리를 역임하는 등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고, 당의장서리 시절 김영삼신민당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도 했다.

박의장은 80년 5.17 직후에는 정치규제에 묶여 6년간 미국에서 정치낭인 생활을 하다 같은TK(대구.경북) 출신인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만든 민주화합추진위 참여를 계기로 정치일선에 복귀했다.

지난 87년 대선때는 민주당 김영삼후보의 상도동캠프에 한쪽 발을 들여놓았다가 돌연 경북고후배인 노태우후보 지원에 나서 상도동측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후 88년에는 다시 집권 민정당 공천으로 13대 국회에 복귀하면서 당대표위원을 맡았고, 3당통합을 앞두고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민정당 간판을 내릴 수도 있다"는 발언을 계기로 박태준(朴泰俊)씨에게 대표직을 인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권토중래끝에 곧 재기, 13대 후반기와 14대 전반기에 걸쳐 국회의장을 연임했다. 그러나 김영삼정부 출범직후 재산공개 파문에 휩싸여 여론의 집중적인 화살을 받다 '팽(烹)'당하고 만다.

박의장은 당시 13세이던 아들 앞으로 명의를 이전한 서울 석촌동 대지 2천6백여㎡, 건평 4천99평 규모의 다세대 주택이 여론의 비판을 받자 "문제가 된 재산을 문화재단에 기증하겠다"며 국회의장과 의원직을 내던졌다. 그러나 박의장은 지금까지 문제의 재산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의장측은 "정부의 과거 임대주택 활성화방침에 따라 소형주택을 매입한 것인데 김영삼정부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마녀사냥식 사정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박의장은 지난 94년 JP가 문민정부 실세들에 의해 민자당 대표직에서 밀려난뒤 함께 자민련을 창당, 동지애를 과시했으나 공천권 배분과 위천단지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JP와 결별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특히 지난 97년말 야권의 대통령후보 단일화 합의 이전부터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만들기'에 주도적으로 나섰으며, 김대통령이 박의장을 여권의 의장후보로 선정한데도 이런 점이 감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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