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의 고향-미국 뉴베드퍼드

입력 1998-02-07 00:00:00

미국작가인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소설 '백경(白鯨)'은 '모비 딕'이라는 거대한 흰 고래를뒤쫓아 오대양을 항해하는 포경선 '피쿼드'호 선원들의 모험담이다.

고아이자 방랑아인 이슈마엘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백경'은 에이허브 선장역을 존 베리모어나 그레고리 펙같은 유명배우들이 맡아 여러차례 영화로 제작됐다.'모비딕'이라는 거대한 흰고래에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선장은 포경선 피쿼드호를 타고 고래사냥에 나선다. 오랜 추적끝에 마침내 흰고래를 발견, 물고 물리는 사투를 벌인다. 배는 부서지고백경의 화자(話者)인 이슈마엘을 제외한 선장, 선원모두가 수장된다. 이슈마엘은 돌아와 파멸을 피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으나 갖가지 알레고리와 상징성이 담겨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즉 흰고래는도전해서는 안되는 절대적 신성 혹은 대자연일수 있고 평화 이면에 숨어있는 악의 화신일수도 있으며, 추적해도 의미를 알수 없는 모호한 진리의 상징일수도 있다. 흰색의 괴물인 모비딕을 추적하는 배의 이름이 백인들에 의해 멸종된 인디언 부족 '피쿼드'라는 점도 대단히 상징적이다.영화의 중간부분은 모비딕을 추적, 대서양과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헤매는 동안 선원들이 겪게 되는 우여곡절의 해상생활, 고래의 생태등을 싣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비딕과의 결투가긴박감 넘치게 펼쳐지고 결국 포경선과 선원들이 파멸에 이른뒤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주의 항구도시 뉴베드퍼드. 영화의 화면이 열림과 동시에 이슈마엘이 "나를 이슈마엘이라 불러라"고 선언하며 향하던 바로 그곳이다. '백경'의 원작이 '주홍글씨' '허클리베리핀의 모험'과 함께 미국문학의 3대 고전으로 꼽히는 대작이어서일까. 뉴베드퍼드의 분위기는여느 항구도시와 달리 유난히 엄숙하다. 관광객들은 웅장하면서도 비장하게 묘사된 영화속의 모비딕과 선장, 선원, 바다등을 떠올리며 명화의 현장을 음미한다.

뉴베드퍼드 조니 케이크 힐의 18번지에 자리한 포경박물관. 1903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은 포경선의모형과 선구(船具), 해산물등을 이용한 세공물, 포경사진등을 전시해 포경관련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고래의 모든것을 책으로 볼 수 있게끔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박물관측은 고래잡이의 생생한모습과 고래의 생태등을 담은 30분짜리의 고래영화를 덤으로 보여준다. 20명에 가까운 박물관 관리인중 2~3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50~60대 나이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는 것은 미국의 숨겨진 저력이다.

박물관 맞은편에서는 출항을 앞둔 선원들이 예배를 보던 '선원교회'가 있다. 때마침 교회에서는뉴베드퍼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한쌍의 남녀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 셋째 일요일에일반예배를 보는 이 교회에서는 수시로 결혼식이나 각종 기념예배를 본다고 이 교회의 케니드 가렛트 신부는 전한다. 교회의 위층 벽면은 영화에서처럼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고래잡이 선원들의 대리석 비명들로 꽉 차있다.

또 교회당 중앙에는 영화속의 매플 신부가 혼신을 다해 설교하던 뱃머리모양의 설교단이 덩그렇게 놓여있고 교회당 뒤편의 긴 의자에는 '허먼멜빌의 좌석'이라고 적혀있다. 멜빌이 22세이던1841년 포경선을 타기위해 뉴베드퍼드에 왔을때 앉았던 자리다. 하지만 이 의자는 멜빌이 실제 앉았던 좌석은 아니다. 1866년 교회에 불이 나 내부가 완전히 타버렸고 이를 복구해 이듬해인 1867년 다시 문을 열었다. '높직한 뱃머리 모양'의 설교단도 실제의 것이 아니지만 보는 이들에겐 실제나 다름없다.

교회앞 잔디밭에는 크지 않은 바윗돌에 동판을 박은 기념석이 하나 서있다. 기념석에는 '바다 깊은 곳의 괴물들에 맞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온힘을 다해 싸우거나 싸우다 희생된 뉴베드퍼드선원들의 용감성에 경의를 표하며, 1930년 8월1일 뉴베드퍼드 어린이들이 세움'이라 씌어있다.교회골목을 빠져나와 뉴베드퍼드 시청옆 시립도서관앞에 이르면 작살을 든 고래잡이 선원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거대한 모비딕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작살을 내리꽂는 모습은 영화속의 작살같이 퀴켁 그대로다. 1913년 세워져 뉴베드퍼드의 상징이 돼버린 이 동상에는 '고래를 죽이느냐, 아니면 배에 구멍이 뚫리느냐'는 고래잡이 선원들의 절박한 모토가 새겨져있다.

'백경'의 작품이 나올 당시만 해도 뉴베드퍼드는 포경업의 전성기를 맞아 3백척의 포경선에 1만명의 선원이 북적댔다. 영화에서처럼 엄청나게 짜내던 고래기름은 이 지역을 기름지게 했다. 하지만1860년대들어 석유가 빛을 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포경업이 시들해지자 자연 뉴베드퍼드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뉴베드퍼드 사람들은 왕년의 '선원기질'을 사장시키지 않았다.1966년 뉴베드퍼드항 일대를 사적지역으로 지정, '백경'의 복구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포경관련자료들을 정비하고 거리를 단장하는등 관광지화사업을 본격화했다. '백경'을 회상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놓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은 뉴베드퍼드가 미국 명소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승격시키려는 지역민들의 집념은 지난 96년 10월 결실을보았고 미국의회는 이 지역에 대한 2백만달러의 발전기금지원을 승인하기도 했다.자원봉사의 위력을 발휘하며 문화유적 관광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뉴베드퍼드 사람들의 모습은포경선의 바닥을 닦아내고 작살의 날을 세우며 밧줄을 다시 매는등 '백경'의 추적준비에 여념이없던 영화속 선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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