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가 국난(國難)지경에 이르자 가장 부산해 보이는 쪽은 정부와 자치단체들이다. 대통령은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들과의 경제외교를 위해 출국하고 정부는 정부대로 IMF자금지원을 좋은 조건으로 받기 위해 분주하다. 자치단체들도 앞다투어 경제살리기에 동참하고나섰다. 외화환전운동, 해외여행 금지, 외제물건 안 쓰기 등을 외치는 결의대회가 전국 곳곳에서벌어지고 있다. 25일 오전8시 대구시청 회의실에서는 각급 기관단체 대표 1백36명이 모여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자율실천 의지를 다짐했다.
하지만 정부와 자치단체들의 부산함은 때늦은데다 공허한 감이 있다. 출국전 김영삼대통령은 "누구의 책임을 묻기보다 모두가 다시 한번 고통분담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24일 오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결의대회를 마치고 나온 대구시 한 직원은 "책임소재에 대한 반성 없이 어떻게 위기를 넘기느냐"고 반박하며 "기업의 부실경영보다 정부와 자치단체의 낮은 경쟁력이 더 큰원인"이라고 짚었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공무원 수는 1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공무원 1인당 인구수가 50명도 안 되는 수치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만 약6만명이 늘었다. 숫자는 늘어나는데 행정서비스는 제자리걸음이다. 민원인들에게 행정기관의 문턱은 여전히 높고 기업에게는 특히 더하다. 몇가지 자금융자 알선으로 중소기업에 생색을 내고 있지만 인허가 등 행정절차는 서류제출에서부터 여전히 복잡하고 더디기 짝이 없다. 기업활동의 활성화나 국민생활의 편의보다 법령, 규제를 앞세우는 탓이다.
달성공단 한 중소업체 사장은 "기업을 하려면 10여개의 행정기관에 늘상 시달려야 한다. 열에 다섯은 불필요한 간섭이고 나머지는 하나마나 한 통과의례다"고 꼬집었다.
국민과 기업이 제살을 깎아내며 고통을 나눠온 것은 이미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가장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못해 도서관을 전전하는 자식은 어디서나 볼수 있다.정리해고 여부를 두고 노사간에 몸을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도 생경스런 장면이 아니다.이에 반해 공직사회는 그야말로 무풍지대다. 내부 생산성 제고를 위해 기관간 통폐합이 이뤄지고조직이 정비돼도 자리만 옮길 뿐 공직에서 내몰리는 사람은 기껏해야 단순 보조인력 정도다. 오죽하면 공무원을 두고 '신이 내린 직업'이라는 우스개까지 나오겠는가.
뉴질랜드 정부는 지난85년 8만5천명이던 중앙공무원을 10년만인 95년 3만5천명으로 감축했다. 지방공무원은 18만명에서 4만명 수준으로 줄였다. 최근 고성장을 질주하는 미국경제의 부활 이면에는 공무원조직의 대규모 정비가 선행됐다. 94년 연방인력재편법을 제정, 그해에만 10만명을 감축했고 99년까지 27만여명을 줄일 계획이다.
나라경제가 부도위기에 처한 지금까지도 정부와 자치단체의 살빼기 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는 대통령 후보들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다. 살빼기가 어렵다면 체질이라도바꿔야 한다. 틀에 박힌 결의대회 따위가 아니라 국민과 기업에 진정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뼈아픈 자성의 소리가 쏟아져야 한다.
문희갑 대구시장은 최근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2기 지방정부가 출범하면 많은 점이 달라질것이다. 불합리한 시행령, 시행규칙과 불필요한 관행에 반발하는 조례가 속속 제정되고 지역민과지역기업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지방행정의 면모를 갖추려 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체질변화가 시급한 공직사회에서 곰곰이 되새겨봄직한 말이다. 〈金在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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