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연줄사회

입력 1997-04-26 14:45:00

20여년 전의 이야기지만 대학원 시절 농촌조사 다니면서 광주에 들러 하룻밤 보낸 적이 있었다.일찍 자기도 무료하여 근처의 맥주집에 들러 한잔 들이켜고 있는데 역시 혼자 와 있던 옆자리 청년이 같이 마시자고 청하였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였고, 청년은 곧장 고향과 출신학교 등을 물으며 우리의 공통된 연고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남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나와 그가 공통점을 찾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는 노릇. 청년은 서울로 진학한 친구들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심지어경상도로 시집간 사촌누이의 이름까지 들먹였으나 나로서는 모르는 이름들 뿐이었다.침묵이 흘렀고 청년도 머쓱한 기분이 드는 듯 잠자코 술잔만 기울이더니 군복무는 어디서 했느냐고 물었다. 육군복무를 했다고 하니 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며 외쳤다. "반갑소! 나도 육군제대를 했는데 우리 한잔 건배합시다" 우리는 그날 대한민국 남자라면 거개가 다녀오게 마련인 육군이라는 헐렁한 연줄 덕분으로 한층 더 가까운 기분이 되어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청년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의 공통연고를 찾아 묻고 또 물었을까. 아마도 공통의 연고가 없는 사람에게는 왠지 서먹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한국인의 보편적 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그래서 드디어 우리가 육군동창생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뭇 안심스럽고 다정한 기분이 되었으리라.

요즘 한창 시끄러운 한보청문회를 보면서 그날밤의 청년이 생각난다. 한국은 연줄사회임을 새삼실감한다. 한보청문회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지연과 학연이, 거기서 나아가 더 세분화된 연줄들이 K1, K2니 하는 패거리 집단을 만들어 나가면서 한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농단하였음을목격한다. 그러나 연줄에 따라 이권과 권력이 배분되는 현상은 정치조직뿐만이 아니라 관료사회,기업, 대학 등 우리사회의 모든 조직에 존재한다.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같은것이다. 그날밤 청년의 연줄찾기가 하룻밤 '우리끼리'의 안심스럽고 다정한 술자리를 위한 것이었다면 한보사건의 연줄찾기는 '우리끼리'챙겨먹자고 한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에는 연줄 사회로서의 한국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날밤 나의 육군동창생의 연줄찾기가 우리 한국인의 보편적 심성으로 건재하는 한,한보청문회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이다.〈경북대교수.문화인류학〉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