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관련 새로 밝혀진 사실

입력 1996-06-24 00:00:00

지금까지 공개, 확인된 한국전에 관한 러시아쪽기록은 金日成이 남침을 감행했으며, 주저하던 끝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개입했고, 毛澤東의 성화에 못이긴 소련도 공군을 만주에 배치했다 는 정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아직도 남아 있는 의문점은 많다.

이와관련, 최근에 이뤄진 러시아쪽 연구와 러시아 국방부, 외무부, 대통령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자료 등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어 관심을끈다.

◆스탈린 南侵승인

[슈티코프(북한주재 소련대사)앞. (50년) 1월 19일자 전문 받았슴, 그런 큰 일(南侵)은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함.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 마련돼야함. 이 문제를 놓고 金日成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음.1950년 1월 30일. 스탈린](러시아 대통령 문서고)

스탈린이 북한주재 대사였던 테렌틴 슈티코프에게 보낸 이 전문은, 여러차례 南侵요청을 받던 스탈린이 실질적으로 김일성의 소원을 받아들이는 첫번째 지령인것으로 평가된다.이 재가에 따라 김일성은 개전 직전인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해 최종 의견조정작업을 벌였고 군비증강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에앞서 김일성은 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 무력통일에대해 문의했으나 북한군의 절대우위가 확보되지 않으면 불가 라는 응답만 받았다. 이후 기회있을 때마다 모스크바를 졸라대던 김일성은 50년 1월 19일 슈티코프를 통해 스탈린 면담을 요청했으며 이를 계기로 마침내 남침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문제는 스탈린의 실질적인 개전허가가 내려진 시점에 毛澤東이 모스크바를 공식방문중이었다는데서 출발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이 毛澤東의 동의를 얻어 한국전의 개전을 승인했다는 자연스런 추측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들 공산주의의 양거두는 모스크바 회담결과를 문서로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추측의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아왔다.

이와관련, 최근의 연구와 새로 공개된 문서들은 당시 스탈린이 모택동과 상의하지 않았거나 모택동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침을 승인했으며 이때문에 모택동은 이후 스탈린과 반목했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종전의 주장을 뒤엎는다.

한국문제 전문가인 나탈리아 바자노바 박사(동방학 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최근 탈고한 한국전관련 저서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허가 전문을 보냈을 때 모택동이 모스크바에 체류중이었다는 사실은흥미롭다. 양 거두는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모든 정황증거로 보아 스탈린은 남침허가와김일성 초청을 모택동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北韓軍 편제표 蘇장교 239명

[모스크바] 소련 군사고문단은 北韓軍 총참모부에 배속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작전부대나정보부대에 소속되기도 했다.

이들 소련 군사고문단은 최고급군사학교(군사아카데미)를 최소한 한군데 이상 졸업한 경험있는우수한 장교들이었다….

소련교포출신인 북한군 총참모장 남일(소련이름 야콥 페트로비치)은 소련에서 대학을 나온 박식한 인물로 군사지식은 빈약했으나, 성실성과 풍부한 학식으로 자신의 임무(소련-북한군의 의사소통)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는 엑센트 없는 러시아어를 구사했다.

소지노프의 이런 증언은 러시아국방부 문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3월1일 현재 북한軍에 배속된 蘇聯軍 고문장교는 1백48명임. 편제표에 따르면 소련軍 고문장교의 숫자는 2백39명이므로 91명이 부족함... (북한군내 소련군 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소장이 모스크바에 보낸 50년 3월15일字 전문. 국방부중앙문서고)

이처럼 개전 직전에 북한군에 배치돼 있던 소련군 군사고문단은 한국전쟁기간중에 숫자의 변동은있었지만 꾸준히 한반도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른 국방부 문서에서 확인된다.소련 국방부가 북한내 군고문단장에게 보낸 한 문서는 우선 개전 직전인 5월 16일 군사고문단과교관 숫자를 2백46명으로 유지토록 지시하고 있다.

또 다른 문서에서 소련국방부는 50년 11월에 개전직전과 같은 병력을 유지토록 명령했으며 전쟁말기인 52년 2월 15일에는 이 숫자를 1백62명, 53년 5월 3일에는 1백52명으로 줄이도록 하달한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蘇聯軍, 美軍포로 직접 심문

미국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포로는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소련군정보당국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미군의 무기에 관한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소련군인이 직접 미국인과 접촉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각 단위부대를 통해 스탈린의 엄격한 접촉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군 포로를 직접 심문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 원인은 미공군이 F-86이라는 신형 전투기를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지역에 설치된 미군포로수용소와 접촉하기 위해 나(증언자)를 포함한 일단의 장교단이 金日成지휘하의 총참모부에 배속됐다.

한국전 당시 북한총참모부에 배속돼 군사고문으로 비밀리에 활동했던 소련군 정보장교(당시 대위)출신의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박사(역사학)는 최근 교육텔레비전 을 통해 방영된 특집프로그램알려지지 않은 전쟁:제3부-38도선 에서 미군포로는 북한이 관리했지만 중요한 군사기밀에 관한심문은 소련군이 담당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는 미군에 대한 심문은 북한군을 통해 간접적으로 행해졌지만 때로는 직접심문도 할 수 밖에없었다고 회상했다.

때로 간접심문으로 통해 들어온 정보가 불명확한 경우가 있어서 추가정보를 얻기 위해 불가피하게 미군포로를 직접 만나야 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위수지역에서 이탈해 지정된 장소에서 북한군이 호송해 온 미군포로를 만나 심문을 진행했다. 미군 조종사들의 대부분은 자진해서 우리의질문에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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