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쉰들러'라고 부르고 있다. 독일 기업가 오스카 쉰들러는 1천명의 유대인을 구했지만 스기하라 시누에는 8천여명의 유대인을 나치의 마수로부터 구해냈다.그는 2차 대전중 일본의 우방 독일 나치의 유대인종 말살야욕이 서서히 드러날때 리투아니아의 일본영사였다. 외교적으로 나치정책에 동조하지 않을수없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와 아내 스기하라 유키코는 집밖에 줄서서 기다리는 겁에 질린 눈들을 뿌리칠수 없었다. "창밖에 있는 어린아이와 어머니를도저히 되돌려 보낼수 없었습니다. 거리를 헤매다가 나치에 의해 죽고말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 유끼꼬는 어린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 입장에서 유대인모자를 잊지 못한다.
결국 스기하라 시누에는 그들에게 일본비자를 발급한다. 아침 8시부터 밤늦게까지 비자에 서명했고 아내는 옆에서 아들을 안고 그를 격려했다.당시 독일은 리투아니아 밖으로의 모든 비자발급을 중단 요청한 상태. 우방일본도 이에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부의 정책보다 인도주의적인 양심이 먼저였다.
일본정부는 몇번에 걸친 발급중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는 스기하라시누에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위해 카우나스기차역으로오면서도 그는 계속 비자에 사인했다. 이 비자들은 나중에 네덜란드 외교관에 의해 발급돼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일본, 상해,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게해주었다.
전쟁이 끝난후 스기하라 시누에는 명령불복으로 외교관 신분을 박탈당했다.그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유대인들에게서 나와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가 사망한지 5년이 지난 92년 마침내 일본 외무부는 그를 사후 복권시켰다.지난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조그마한 파티가 열렸다. 유대인학살사 녹취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스기하라(81)여사와 그의 네 아이들을 초대한 파티였다. 그때 살아남은 많은 유대인들이 뜨겁게 그들을 맞았다. "스기하라씨는칠흑같은 어둠에 한점 등대같은 존재였다"고 그에 의해 목숨을 건진 솔리 가너씨가 말했다.
깊게 팬 주름의 스기하라여사는 이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김중기기자〉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