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타인의 시간

입력 1994-08-01 08:00:00

잉크의 시간-1아무래도 그 사진부터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의 뇌 속에는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신경 세포가 물경 140억개나 있다고한다. 어쩌면 그 세포속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를 조종하는 어떤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가령 흉몽이나 참상 같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않는 것일수록 그리고 의식적으로 외면할수록 그것은 더욱 선명한 빛깔로다가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곤 하니 말이다. 나는 그 사진이 떠오를 때마다불현듯 그런 망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사진은 우리 집 안방 장롱 속에 있었다. 거기에는 지난 날 우리 가족들의 해맑은 모습들을 보여주는 사진첩 한 권이 들어 있는데, 지난 일요일에내가 다시 그 속에 꽂아 두었었다. 흑백이었고, 한 소녀의 독사진이었다.예닐곱 살은 먹었을까. 설날 아침인 모양이었다. 매구같이 때때 설빔을 차려입고 꽃주머니를 찬 사진속의 소녀는 반듯하게 가리마를 탄 머리를 두 갈래로 쫑쫑 닿고 있었고, 퍽하고 터지는 마그네슘 섬광에 놀랐던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있었다.

원래 그 사진은 이모댁에 있었다. 국민학교 사학년 때던가. 전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이모 댁에 놀러 갔을 때,이모가 내게 준 것이었다.[승혜야, 너 이 사진 보면 누군지 알겠니?] 집에 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이모가 난데없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나에게 물었었다. 무심코 들여다본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어머, 이모, 내 사진이 왜 여기 있어?] 나의 말에,이모가 까르르 웃다가 대꾸했다. [승혜 눈썰미 하나는 알아줘야겠어. 그래 너야. 접때 우리집에 와서 찍은 거, 기억 안 나니?] 이모의 말을 듣고 나는 오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종시 그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러나 나는 사진 속의 소녀가 내 마음에 쏙 들어 내가 찍은 것으로 기억속에 새기고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응, 이제야 기억 나, 이모. 그때 이모가 내 옷이 예쁘다고 억질로 사진관으로 데리고 가서 찍어 주었었잖아.] 그리고 나는 앙큼하게 그것을 받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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