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소년장군" 일군간담 서늘케

입력 1993-08-17 08:00:00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병장(본명 태호)의 친동생으로 1906년3월 영해에서일어난 영릉의병진에 가담, 항일의병활동을 편 영덕출신 신우경의병장(62년74세로 작고)에게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형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우경의 항일의병활동이 해방 48년만에마침내 그 공적을 인정받은 셈이다.

영덕군 축산면 복평리에서 신석주의 둘째아들로 출생한 우경은 형과 함께 국운이 기울무렵인 1906년 18세 어린나이로 의병활동에 몸을 던졌다.그후 우경은 1910년까지 약4년간 형인 신돌석의병장의 좌우익장과 유격선봉장으로, 영해 울진 청송 영양등 경북북부산악지대를 주무대로 일본군섬멸에앞장서 큰 전과를 올렸다.

당시 우경은 소년장군으로 크게 명성을 날려 충북이남지역을 비롯 강원도 영월까지 곳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특히 전투시에는 늘 {내가 신돌석이다}고 외치며 적을 공격해 곳곳에 신돌석이 나타난다는 신출귀몰한 게릴라전법을 쓴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1908년 신돌석의병장이 상금을 탐낸 동족에 의해 살해되고 이를 고비로 의병활동이 주춤해지자 우경은 형의 장례를 치르고 태백산에 몰래 숨어들어 의병동지들과 재기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듬해 영해고향에 잠시 돌아와 있던 우경은 그해 7월 역시 동족의밀고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이때 총상으로 오른쪽 무릎뼈를 다쳐 평생 불구가 된 우경은 1910년5월 대구헌병대에 체포, 압송돼 6개월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 가까스로 총살형을 면하고 풀려나 귀향했다.

그후 해방이 되고 정부가 들어서자 우경은 1948년 형의 유허비를 축산면 복평리 마을입구에 건립하고 자신의 아들 병욱을 형의 양자로 입양시킨데 이어신돌석의병장의 실기를 발간하는등 형의 궤적을 그리다 1962년3월20일 동해안국도변 야산에 쓸쓸히 묻혔다.

후손으로는 딸 유칙(62) 분호(77)아들 병원이 생존해 있다.한편 우경의 항일의병활동공적을 발굴한 영덕문화원 서두석원장은 "신우경의의병활동은 잔악한 일제의 억압으로 자료가 없어 발견이 어려웠으나 뒤늦게나마 그 공적이 인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행한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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