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해묵은 친일파 논쟁

입력 1993-07-16 00:00:00

친일파문제를 둘러싼 역사논쟁이 또 일고 있다. 지난번 국회에 제출한 보훈처의 자료에 독립유공포상자 가운데 친일행위자가 있어 그를 제외할 방침이라고 8명의 명단까지 제시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보도된 명단의 실적대로라면어떤 이는 친일파라고까지 말할 수 없는 인사도 있었다.친일파라면 1948년의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시행때처럼 대수롭지 않는 일회성의 행동이거나 일제하에서 말단의 직업에 종사했던 촌부까지를 일컫는 것은아니다. 그렇다면 국회에서 문제삼았던 것이 잘못이었던가. 그렇지는 않다.국회에서 논란한 것은 친일파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유공자에 관한 문제였다.독립유공자라면 친일파는 아니더라도 사소한 친일행위가 있어도 그 명예를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논쟁이기도 하지만 독립유공자는 명예와 함께 매월 적지않은 연금을 받고 그 연금은 국민(세금)이 지급하고 있으므로 현실의 문제이다. 따라서 한치의 과오도 없는 독립운동자이어야 한다.이러한 포상유공자와 친일파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렇게 된것도 무리는 아니다. 해방후 친일파에 대한 청산작업이 파국으로 끝난 뒤에아무런 수습도 없었으므로 오늘날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이 무리는 아니다.{반민특위} 용두사미-친일파문제를 역사에서나마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해방정국이 분단정국으로 전환할때 식민지 잔재 청산에 눈돌릴 겨를이 없는 틈을 타서 친일파는 미군정하의 각계에 침투하였다. 그리고47년7월 과도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잔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군정이 묵살한, 그와같은 민족외적 분위기 속에서 만만치않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을때 친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추진될 전망이 보였다. 그런데 독립운동자의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이승만이었으므로 그의 정부에는 친일파가 대거 참여하고 있어 출발부터 우려되는 바가 적지않았다. 드디어 48년6월 국민계몽협회라는 반동단체가 나타나 반민특위를 해산하라는 시위를 벌이더니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이른바 반민특위사건이일어나고 말았다. 이때 각 도의 사무국도 박살이 난 곳이 많았다. 이러한 난동으로 반민특위는 8월22일에 문을 닫고 잔무는 대법원으로 이관되어 50년3월에 모두 마무리지었으니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용두사미격이 되고 말았다.이와같이 친일파에 대한 숙청은 친일파의 반격으로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그후 6.25정국 속에서 친일파들은 반공투사로 분장하여 사회지도층으로 부상하였다.

누구보다도 반공의 목소리를 높이며 그들은 중도 민족주의자까지 회색분자나공산당으로 몰아붙이며 열성높은 애국자로 자처하였다. 그것이 자기들은 생존의 발악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민족정서는 혼돈에 빠지고 정국은 혼미해져역사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한 혼돈의 연속을 기화(기화)로 군사정권도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친일파 청산문제가 기회있을 때마다 역사논쟁으로 다시 대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아울러 극단적 반공주의에 희생된 민족주의의 중도파와 중도좌파에 대한 재조명이 촉구되고 있다. 해방과 더불어 국토가분단된 것은 미국과 소련 탓이었지만 국토분단을 민족분단으로 몰고간 것은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친일파까지 가세하여 우리의 좌우논리가 더욱극단화되어 분단을 경직시켰다고 보면 이제는 극좌.극우를 막론하고 반성해야한다. 그것이 통일을 내다보며 갖추어야할 민족적 자세일 것이다. 그러한 반성작업의 측면에서 생각하더라도 친일파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회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친일파 논쟁과 독립유공자 논쟁은 구별할 줄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작년에 알마아타에서 김일성대학 부총장을 지낸 박일 교수를 만났을 때 그는북한의 남로당과 연안파등에 대한 숙청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너무 논리를 따진다고 했다. 그때 필자는 남한에서는 논리가 서지 않았던 현대사를 반성하고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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