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평생 가난의 남루를 벗지못한채 지아비를 증오하다 65세로 세상을떠났다. 하던 지아비 덕분에 6.25전쟁 전에는 읍내 지서와 서북청년단 사무소로 끌려다니며 적잖은 곤욕을 치렀다. 휴전 무렵까지는 낯선 땅 대구에 정착하여 네 자식 거느리고 굶기도 많이 굶었다. 살아 생전 아버지 말만 나오면 어머니 입에서 온갖 험담이 그치지 않았다.단신 월북해버린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올해 79세이다. 우리 가족은 1950년 9월이후 아직도 아버지의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산가족의 한-우리집에는 햇수 60년쯤은 됐을 통영장롱이 있다. 장롱에는지금도 아버지의 명주바지저고리며 여름용 모시적삼과 바지가 있다. 단구에여위었던 분이라 그 옷은 우리 형제 누구에게도 맞지가 않아 40여년을 그대로간직된 채 대물림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중 한창 어렵던 시절 어머니는 왜 그 옷을 한 됫박이나마 양식감과 바꾸지 않았을까. 바느질 솜씨가 있던 분이라 그 옷으로 자식들 옷을 만들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지아비라면 그 옷을 불싸질러버리지않고 왜 40년 동안 그 잦았던 이사에도 불구하고 눙쳐넣고 다녔을까.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평생 한맺혀 살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지도13년, 요즘에 와서야 그 의문이 자주 떠오른다. 언제인가 살아생전 다시 만날날을 믿으며 그 옷을 보관했을까. 이를테면 증오와 애정은 동전앞뒷면이 아닐까.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고인은 말이 없으므로 그 답을 들을 수가 없다.아니, 살아계셔도 어머니 흉중의 진솔한 답을 듣기는 힘들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념은 몰랐어도 이념이 준 상처가 너무 깊기에 끝내 입을 열지 않을터이다.
처도 어쩔 수가 없어 지금까지 그 옷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옷이야말로 이산가족의 원한 그 자체이다. 이산 43년, 당신이 살아계신지 타계했는지 모르나 언제인가 당신의 유골이라도 찾게 된다면 어머니의 한과 함께 그 옷을 묻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냉전시대의 산물인 이념이 퇴색하자 공산주의 국가는 차례대로 무너졌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베트남조차 이념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선택했다. 남한은 오랜 군사정권 통치시대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국내외 정세가 개방과 화합의 시대로 들어서니 통일을 향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을수밖에 없다.
남북장벽은 요지부동-그러나 급변하는 세계정세와는 담을 친듯 남북현안만은요지부동이다. 북한의 핵이 걸림돌이 되어 정상회담을 전제한 특사교환은 커녕 실무접촉마저 어렵다.
과 을 병행하여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겠다는 명분도, 잘 차린 상에 객이 오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
45년부터 93년, 장장 48년에 이르도록 권력의 정상에서 한 발도 물러가본적없는 김일성은 아직도 자신의 만 믿으며 자신감에 차있다. 그는 주체사상을 부퇴전의 이념으로 신봉한다. 81세란 노령임에도 생노병사의 필연을 부정하며 세습왕조 수호에 박차를 가한다. 인민에게는 로 족쇄를 채워 부자에게 충성을 강요한다.
우리쪽도 북한의 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니 남북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말았다. 보안법의 타당성이 강조되어 구속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남북문제가 악연으로 꼬여만 가니 천재지변같은 이적이 없는한 통일이 금세기에는 힘들겠다는 예감이 든다. 이산가족의 상봉은 물론 생사확인조차 어렵겠다는 느낌이다.
고통의 끝은 어디에-분단 48년, 6.25전쟁 43주년을 맞으며, 답답한 마음이어디 필자뿐이겠는가. 그 처참했던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없이 남북한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고 자위하기에는 너무 긴 고통의 세월이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