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동아지중해 국제대전 이후 유라시아로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입력 2026-10-12 13:43:57 수정 2026-10-12 13: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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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동아시아 국제대전 이후 고구려·백제 유민들 흩어져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주민의 경험과 기술, 기억 사라지지 않아

중국 태원, 북제 서현수묘 벽화. 고구려와 연관이 깊고, 훗날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지역이다.
중국 태원, 북제 서현수묘 벽화. 고구려와 연관이 깊고, 훗날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지역이다.

국가가 멸망해도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포로로 끌려가고, 복국을 꿈꾸며 탈출하고, 바다와 초원을 건너 낯선 곳에 정착한다. 7세기 동아시아 국제대전 이후 고구려·백제 유민들은 요동과 만주를 넘어 황하의 서쪽 변경, 몽골초원, 티베트고원 부근과 일본열도까지 흩어졌다.

오사카부의 백제왕신사
오사카부의 백제왕신사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의 멸망과 신라의 통일을 전쟁의 승패, 왕조와 영토의 변화로 설명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국경선에만 남지 않는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살아남았고, 정착한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필자가 전근대 한국사에 디아스포라라는 관점을 적용해 온 까닭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산과 난민 뿐 아니라 정착과 재결집, 새로운 관계망의 형성까지 살피는 개념이다. 각각의 이동 동기는 구분해야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주민의 경험과 기술,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설명했다.

아스카 자료관 백제 불상
아스카 자료관 백제 불상

660년 백제의 멸망,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의 패배,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이어 신라는 당과 7년 동안 '나당전쟁'을 벌였다. 당이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렸다고 동부 유라시아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토번국(티베트)'이 청해와 서역(중국 신장지역)의드)의 교통로(실크로드)를 두고 당과 충돌했고, 670년에는 대비천에서 당군을 대패시켰다. 북쪽에서는 682년 무렵 제2돌궐 카간국이 부흥했으며, 요서에서는 '거란'과 '해'가 활동했다. 만주에는 여러 말갈 집단과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전쟁의 종결은 또 다른 세력 경쟁과 주민 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은 정복한 땅의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일부를 군사조직에 편입시켰다. 반대로 변경의 유목세력과 지역집단은 당의 지배력에 도전했다. 한쪽에서는 주민의 강제 이산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결합이 진행됐다.

백제인들이 쌓은 방어체제인 기쿠치성의 팔각건물
백제인들이 쌓은 방어체제인 기쿠치성의 팔각건물

◆ 중국 오지로 끌려가는 고구려 유민들
고구려인의 강제 이주는 멸망 전부터 시작됐다. 645년 당 태종이 침공했을 때 요동성 등에서 포로가 발생했다. 668년 평양성 함락 뒤에는 보장왕과 왕족·귀족, 장수와 관리들이 장안으로 압송됐다. 이듬해 당은 대규모의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구당서》는 2만 8200호, 《자치통감》은 3만8천200호, 《삼국사기》는 3만8천300호로 기록한다. 《신당서》의 3만이라는 수치와도 차이가 있다. 호수와 인원 단위가 다르므로 정확한 총인구를 단정할 수 없지만, 수많은 가족이 고향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고송총 여인상
고송총 여인상

이들은 회하와 양자강 사이인 강회(江淮)·호북성과 사천성의 중경 일대인 산남(山南)·산서성의 태원 일대인 병주(幷州)와 감숙성의 무위 일대인 량주(涼州)의 서쪽 등 오지로 옮겨졌다. 고구려의 복국시도들을 막는 한편 노동력과 변경을 방어하는 인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677년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으로 임명해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을 무마하려 했었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과 연계해 재건을 모색하자 다시 사천성 청두 근처의 공주(邛州)로 유배했다. 주민의 일부도 하남(하남성)과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 동부에 걸친 광대한 변경인 농우(隴右)로 옮겼다. 당의 서북 변경에는 고려병(高麗兵)이 활동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산동과 황토고원, 티베트고원 인근까지 고구려인의 발자취가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고구려의 역사와 조상들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감숙과 청해를 실크로드의 역사 공간으로, 사천은 유비와 제갈공명의 촉나라의 옛 땅으로만 기억한다. 사슬과 밧줄에 묶인 그들은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황토고원의 거센 바람을 맞고, 수많은 산과 강을 건넜을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개척한 고마군에 있는 고마신사의 약광왕 모신 신사
고구려 유민들이 개척한 고마군에 있는 고마신사의 약광왕 모신 신사

◆또 다른 운명을 개척한 고구려 유민들
이주민들의 운명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는 포로와 노비가 됐고, 어떤 이는 황무지를 개척하거나 당의 변경군에 편입됐다. 8세기 중엽 고구려계 군인 고선지는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을 넘나들며 당의 서역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안사의 난 이후 산동에서는 고구려계 이정기 일가가 강력한 군사·정치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납은 782년 제왕(齊王)을 칭했다. 이들은 고구려를 복국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정치·군사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만든 인물들이었다.

고구려 건축양식이 적용된 법륭사의 금당. 안에 고구려양식의 불상이 있다.
고구려 건축양식이 적용된 법륭사의 금당. 안에 고구려양식의 불상이 있다.

몽골초원의 돌궐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구려계 고문간은 제2돌궐의 묵철가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 막리지'라 불렸다. 고공의 등도 유민집단을 이끌었다. 715년 이들이 돌궐에서 당으로 귀부한 사실은 고구려계 세력이 초원정치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제2돌궐의 성장에 미친 영향은 연구할 문제이지만, 건국에 직접 참여했다는 주장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인의 활동 무대를 만주에 가둘 수 없는 까닭이다.

고향과 그 주변에 남은 이들은 적극적으로 복국을 시도했다. 670년에 검모잠은 남쪽에서 고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저항했고, 보장왕도 요동에서 옛 주민을 규합했다. 그런데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조양 일대)'에서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자 걸걸중상과 말갈계인 걸사비우는 유민들을 모아 전투를 벌였고, 이어 대조영은 이들을 결합해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면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이렇게 이산과 저항을 하면서 동아시의 질서재편에 역할을 하는 한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토대와 힘을 갖춰갔다.(《고구려 해양사연구》)

고구려 유민들이글려간 감숙성에 있는 돈황 막고굴
고구려 유민들이글려간 감숙성에 있는 돈황 막고굴

◆신흥 일본국 건설에 참여한 백제 유민들
백제인들에게도 멸망은 대규모 이산과 망명, 난민이라는 상황을 만들었다. 660년 음력 9월 의자왕과 왕족·신료·군인·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삼국유사》는 압송된 사람을 1만2천807명으로 전한다. 복신·도침·부여풍 등이 부흥전쟁을 벌여 한때 당군과 신라군에 맞섰지만, 663년 음력 8월말에 벌어진 백강(백촌강) 전투와 주류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유민의 일부는 퇴각하는 왜의 배에 올라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이름이 끊어지고 조상들의 무덤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됐다는 기록이 실렸다. 또 665년에 백제인 400여 명, 669년에는 700여 명이 오미(시가현 비파호 부근)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송총 현무도
고송총 현무도

백제와 왜는 4세기 후반부터 왕실과 귀족, 승려와 기술자들을 통해 긴밀하게 교류했다. 백제 유민은 이 인적 기반을 활용해 새 사회에 정착했다. 배를 타고 건넌 사람들 가운데는 군인과 관리, 승려뿐 아니라 생활 기술을 가진 장인과 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일본 조정이 필요로 하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피난민이나 개척민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국은 당·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규슈와 세토내해의 방어체계를 강화했다. 이 때 다자이후의 수성(水城)과 조선식 산성들을 건설하는 일을 주도한 백제계 귀족인 여러 달솔들과 기술자들은 축성술과 군사조직·행정 경험 등을 전했을 것이다. 일본이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일본국'이라는 국호와 율령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데에도 한반도계 주민들의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었다. 물론 이 변화는 일본 내부의 개혁과 당의 제도 수용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나라시내에 있는 고(구)려사터
나라시내에 있는 고(구)려사터

그들의 기여는 문화에서 더욱 뚜렷했다. 백제가 전한 불교·건축·조각·공예는 이미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깊이 참여했다. 나라시대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불교미술과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일본 고대문화의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백제계인 승려 행기(行基)는 민중에게 불교를 전하고 다리와 저수지 건설에 참여했으며, 도다이지 대불 조성을 돕고 대승정에 올랐다. 승려 양변(良弁)은 도다이지의 성립과 발전에 힘썼고, 기술자 가문 출신인 국중공마려(國中公麻呂)는 대불의 주조를 맡았다. 왕족 출신인 경복(敬福)은 749년 무쓰국에서 생산된 황금 900냥을 바쳐 대불의 도금에 기여했다. 신흥 일본의 국책사업인 동대사와 대불의 완성은 백제계 후손들의 지식과 기술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결과물이다.

돌궐 1제국 왕실기념비 몽골국립박물관
돌궐 1제국 왕실기념비 몽골국립박물관

◆일본국과 모국인 고구려(발해)를 이어준 고구려유민들
고구려계 주민도 일본에 정착해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16년 일본 조정은 흩어져 살던 고구려계 주민 1천799명을 무사시국에 모아 고려군(高麗郡)을 설치했다. 지금의 사이타마현 히다카에는 약광(若光)을 기리는 '고마(高麗)신사'가 남아 있다. 고구려계 소나씨의 후손들은 고려조신(高麗朝臣)이라는 성을 받았으며, '고려조신대산'은 761년, '고려조신전계'는 777년에 일본의 발해 외교에 참여했다.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계 가문이발해와 일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구체적인 사례다. 일본의 미술에도 고구려와 이어지는 흔적이 많다. 나라현 아스카의 다카마쓰총(高松塚)·기토라(キトラ)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인물도와 천문 표현은 무덤 구조와 함께 고구려 고분과 매우 연관이 깊다. 이미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계 승려 혜자·혜관·담징 등의 활동과 호류지(법륭사) 등 초기 불교미술의 전개를 함께 살펴보면, 일본 문화가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인적·문화적 교류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동대사 대불전 뒷편 언덕에 있는 고구려 부경양식의 건물
동대사 대불전 뒷편 언덕에 있는 고구려 부경양식의 건물

신라인의 이동은 망국의 유민과 달랐다. 나라가 존속한 가운데 사신과 승려, 유학생·상인·선원들이 당과 일본에 진출했다. 산둥과 대운하 주변의 신라인 공동체는 통역과 교역, 운송과 종교활동을 통해 고향과 이주지를 연결했다. 9세기 장보고는 이런 인적 기반을 조직하여 신라·당·일본 사이의 해상 무역망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동아지중해 국제개전의 결과는 한민족을 강제 이산에서 자발적 이동,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른 형태로 동부 유라시아 세계로 확대됐다.

동대사 대불전. 752년 완공된 세계 최대 목조건물
동대사 대불전. 752년 완공된 세계 최대 목조건물

◆디아스포라로 보는 역사
국가 중심의 역사에는 국경 밖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로를 추적하면 전쟁의 결과가 달리 보인다. 당의 변경군과 노예로 편입된 고구려인, 돌궐 정치에 참여한 유민, 일본국의 성곽들과 대불을 만든 백제계 인물, 발해와 일본을 왕래한 고구려계 사신, 바다를 누빈 신라인들은 새 국제질서에 참여했다. 그들은 몸과 함께 조국이 오래 축적해 온 지식과 기술, 신앙과 기억, 인적 관계까지 이동했다.

백제계인 행기 대승정
백제계인 행기 대승정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지만 그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새 역사를 만들었고, 일부는 옛 국가의 회복을 꿈꾸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영역에서는 698년 훗날 발해로 이름을 바꾼 또 하나의 고구려가 탄생했다. 그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이산·탈출·재결집을 거쳐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부활시키는 과정이었다. 옛 땅을 회복한다는 '다물'의 역사적 지향을 떠올리게 한다.

유민들 이동도
유민들 이동도

이러한 역사는 오늘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현재 약 80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들이 세계 곳곳에서 살아간다. 중국·일본·중앙아시아와 미주를 비롯해 그들이 정착한 지역도, 떠난 이유와 시기도 서로 다르다. 고대의 강제 이주와 현대의 이민을 같은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낯선 사회에 적응하면서 고향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한다는 점은 함께 생각할 가치가 있다. 재외동포는 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주국의 구성원이자 독자적 삶의 주체이다.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상실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이동한 한민족들이 어떻게 새 공동체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고, 오늘의 공존과 협력, 미래의 유라시아 연결 가능성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