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2000년대 시트콤·아침드라마 재현해 인기
해외도 'AI발 복고'…과거 생활·대중문화 소재로
1인 창작자, 작가·감독·촬영 역할…제작 문턱 낮아져
정교해지는 AI영상에 저작권 숙제…"2차 검증 필요"
"저 원래 많이 못 먹어요"
소개팅 자리에서 수줍게 말했던 여성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빈다. 편한 옷차림으로 한창 비빔밥을 먹던 중 소개팅 상대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통화를 이어가던 중 어머니가 "양푼이 하나 더 비벼줄까"라고 묻자, 여성은 다급하게 "엄마!"를 외친다. 화면의 색감부터 유쾌한 상황까지 2000년대 가족 시트콤의 한 장면 같다.
하지만 이 장면을 연기한 배우도, 촬영감독도 없다.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30초 남짓의 'AI 드라마'다.
최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AI로 만든 숏드라마가 인기다. 신기한 장면을 구현하는 AI 영상이 이제는 캐릭터와 대사, 서사를 갖춘 '드라마'로 진화하는 양상이다. 특히 최신 기술로 1990~2000년대 드라마와 시트콤의 감성을 되살린 콘텐츠가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눈길을 끈다.
◆AI가 되살린 '그때 그 시트콤'
국내에서 눈에 띄는 계정은 '몽땅거침없이순풍감자별'(@koreansitcom)이다. '몽땅 내 사랑', '거침없이 하이킥', '순풍산부인과', '감자별' 등 과거 인기 시트콤 제목을 조합한 이름에서부터 계정의 성격이 드러난다.
현재 팔로워 약 6만7천명을 보유한 이 계정은 30초 안팎의 일상 에피소드를 통해 2000년대 초반 시트콤의 정겨운 분위기를 AI로 재현한다.
소개팅에서 적게 먹는 척했던 여성이 집에 돌아와 양푼 비빔밥을 먹는 영상은 조회수 276만회를 기록했다. 또 이삿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짜장면과 군만두, 탕수육을 먹는 영상도 조회수 275만회를 넘었다. 이 외에도 조회수 수백만회를 웃도는 영상이 다수다. 댓글에는 과거 중국집 음식을 그릇에 배달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등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유행한 대중가요를 배경음악으로 활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화면의 색감과 대사·표정부터 음악까지 맞물리면서 과거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오는 12월 24일부터 '대답하라 2002'를 선보인다고 예고해 개별의 숏폼 에피소드에서 연속적인 서사로의 확장도 시도한다.
이러한 감성은 시트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계정 '함반'(@mu7fox)은 '인어 아가씨', '하늘이시여' 등을 집필한 임성한 작가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대사체를 AI 드라마에 녹여냈다. 인물 간의 독특한 말맛은 한때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일·아침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AI발(發) 복고'는 국내만의 현상도 아니다. AI 크리에이터 마리아 룹초바(@dreamfall.art)는 1990~2000년대 미국 로맨스 영화와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영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룹초바는 자신의 작업을 단순히 빠르게 콘텐츠를 생성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술과 감각, 상상력, 스토리텔링 등을 결합하는 새로운 창작 매체로 설명한다.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70만 명에 달한다.
최첨단 기술이 향하는 곳이 '과거'라는 점도 흥미롭다. 1인 가구가 늘고 저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에 AI가 재현하는 것은 결국 온 가족이 한집에서 지내던 풍경이다. 새로운 기술이 과거의 생활 방식과 대중문화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셈이다.
◆낮아진 제작 문턱…저작권 우려는 숙제
AI 드라마가 늘어난 배경에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영상 생성 AI 기술이 있다. 텍스트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물과 배경, 움직임과 카메라 연출까지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개인 창작자도 대규모 촬영 인력이나 세트 없이 영상 제작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최근 AI 영상 제작에 활용되는 도구 가운데 하나가 '힉스필드(Higgsfield)'다. AI 배우와 장소·소품 등을 설정하고 카메라 움직임이나 색감 등을 조절해 장면을 만들 수 있다.
물론 버튼 한 번으로 드라마 한 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구상하고 장면별 영상을 생성한 뒤 수정·편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만 촬영과 제작 문턱이 낮아지면서 한 명의 창작자가 작가와 감독, 촬영·조명 등의 역할을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편 AI 드라마가 정교해질수록 저작권을 둘러싼 우려도 나온다. 실제 배우나 기존 작품을 직접 모델로 삼지 않았더라도 완성된 장면에서 특정 배우 또는 작품이 연상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힉스필드도 실제 얼굴이나 보호받는 지식재산권(IP)이 포함됐다고 판단되는 경우 생성을 제한하는 콘텐츠 보호 시스템을 운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권현준 대구영상미디어센터장은 "기존 인물이나 콘텐츠와 흡사한 결과물이 나온다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라며 "AI가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레퍼런스를 참고하고 학습해 결과물을 만드는 만큼 무조건 문제가 없다고 보기보단 2차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