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이 거세지는 가운데 온라인에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반응도 눈에 띈다.
가령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음대로 각색하면 되는 것 아니냐" "5·18 민주화운동도 똑같이 왜곡해 영화로 만들면 되겠다"는 식이다.
실제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암살자들 5·18 버전'이라는 제목을 내건 게시물까지 등장했다. 정치권에서도 5·18과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을 '암살자(들)' 논란과 비교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자신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와 인물이 음모론적 소재로 소비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상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도 똑같이 다뤄보자"는 생각은 일종의 복수처럼 느껴질 수 있다.
◆"배우들이 무슨 잘못인가"…피해자 가족이 먼저 그은 선
그러는 가운데 이번 논란에서 눈길을 끈 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아들, 즉 유족 당사자인 박지만 EG 회장의 태도였다.
조선일보 인터뷰를 보면 박지만 회장은 영화 내용에 대해선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출연 배우들을 향한 비난 문제를 두곤 "배우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상영 중단이나 손해배상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대로 알게 됐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육영수 여사를 잃은 유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격앙될 수도 있는 위치다. 그럼에도 어찌 보면 초연했다. 영화에 대한 비판과 배우 개인을 향한 공격을 구분했다. 최근 일각에서 주연 유해진 등 배우들의 광고 제품까지 대상으로 삼은 불매 움직임이 나타난 것과도 대비되는 대목이다.
역사왜곡을 비판하면서 또 다른 역사왜곡을 예고한다면 논리는 스스로 약해진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사실에 근거해 다뤄야 한다는 원칙과 5·18 민주화운동,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사실에 근거해 다뤄야 한다는 원칙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원칙이다.
"우리 역사를 건드렸으니 너희 역사도 건드리겠다"는 식으로 흘러가면 역사적 사실은 진영끼리 서로 던지는 무기가 된다. 상대가 왜곡했다고 믿는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비판했는지도 희미해진다.
상식적인 이 말, 절제가 필요하다.
◆매케인은 오바마를 공격할 기회를 스스로 멈췄다
해외 보수 정치사를 살펴봐도 이런 절제가 오래도록 향기를 남겼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유세장에서 한 여성 지지자가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불신한다며 사실과 다른 주장을 꺼냈다. 그러나 매케인은 자신의 지지자가 경쟁 후보를 공격하는 좋은 기회로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끊고 오바마를 두고 "품위 있는 가정적인 사람이며 시민"이라고 바로잡았다. 자신과 근본적인 정치적 견해가 다를 뿐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에 일부 지지자가 야유했지만 매케인은 "우리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정치가 행해져야 하는 방식"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매케인은 선거에서는 졌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은 매케인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소환된다. 매케인을 넘어 미국 보수의 품격으로 말이다.
◆자신 꺾은 클린턴에게 "당신의 성공은 나라의 성공"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비슷한 장면을 남겼다.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에게 패한 부시 전 대통령은 이듬해 백악관을 떠나면서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클린턴에게 손편지를 남겼다. 그는 새 대통령이 받을 비판과 어려움을 걱정하면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마지막엔 이렇게 썼다. "당신의 성공은 이제 우리나라의 성공이다."
권력을 빼앗긴 패자가 승자에게 남긴 말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후 정치적 경쟁을 넘어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고 함께 공익 활동에도 나섰다. 보수의 품격은 물론 진보의 품격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일고는 맞받아치지 않았다…어른들의 정치가 배울 만한 장면
이번 논란과 맞물려 다시 떠올려볼 만한 장면이 하나 있다.
지난 6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배재고 일부 선수들이 광주일고를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등의 구호를 외쳐 논란이 일었다.
'스타벅스 가야지'는 앞서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인 5월 18일에 '탱크데이' 프로모션을 진행했다가 5·18 비하 논란을 일으킨 사건을 끌어온 표현이다. '탱크데이'는 계엄군의 탱크를, 함께 사용한 '책상에 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배재고는 6대2로 앞서고 있었고, 광주일고 선수들은 상대의 조롱성 응원에도 덕아웃에서 기아 타이거즈 응원가 '광주의 함성'을 부르며 그라운드의 동료들을 응원했다. 같은 방식으로 되갚는 대신 자신들의 응원을 이어간 것이다.
배재고 야구부는 이후 사과했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처음 6개월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가 대한체육회 재심에서 1개월로 감경했다. 다만 응원을 주도한 학생 2명은 결국 야구선수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민주당 일각에서는 배재고 학생들의 언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최근 '암살자(들)' 논란에서는 일부 민주당 인사들이 "픽션"임을 강조하거나 영화 관람 의사를 밝히면서 보수 진영에서는 "역사 문제에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5·18은 특별법에 따라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하는 별도의 법적 보호 대상이어서 영화적 상상력 문제와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반박해왔다.
어느 쪽 설명에 무게를 두든, 광주일고 학생들의 대응이 보여준 태도는 분명 귀감이 된다. 상대의 조롱에 같은 조롱으로 맞서지 않고 자기 팀을 응원했다. 정치권 양쪽이 역사 문제로 서로를 향해 수위를 높이는 지금, 어쩌면 어른들이 고교생들로부터 배울 게 있다.
◆'보수의 품격'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
'보수의 품격'이라는 교과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언론과 시사평론가들이 마치 정치의 품격을 재단할 권한이라도 가진 듯 만들어낸 허공의 수식이자 담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넘지 않는 것, 책임져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 정치적 상대의 역사와 인간적 존엄까지 공격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진영을 넘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속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지만 회장의 "배우들이 무슨 잘못인가"라는 짧은 말은 이번 논란에서 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영화는 비판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관계도 치열하게 따질 수 있다. 제작진의 책임을 묻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5·18 민주화운동을 끌어와 "우리도 한번 왜곡해보자"고 하는 순간 문제 제기의 설득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품격은 상대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선언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절제를, 자신은 끝까지 지키는 데서 드러난다. 역사 속 모범으로 길이 남은 인물들의 태도가 대체로 그랬다.
이번 '암살자(들)' 논란이 보수 진영에 남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일지 모른다. 역사를 지키겠다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역사만이 아니라 다른 역사적 기억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강한 반박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