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수도권정비계획법 제정·공포...삼성, 신규 공장 건설 금지 위기
반도체·PC, 수도권정비계획 공장 신증설 규제 대상 제외 문서 전격 재가
1983년 12월 31일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수도권으로의 폭발적인 인구·산업 집중과, 휴전선에서 가까운 수도권의 안보적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강력한 억제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법 제정 덕분에 삼성은 된서리를 맞았다. 삼성은 이미 기흥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첨단 반도체 1라인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다. 바로 옆에 256KD램 생산을 위한 제2라인 건설을 준비하려던 참에, 신규 공장 건설이 전면 금지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256KD램을 개발하고도 양산하지 못하게 된다. 유일한 탈출구는 법적 규제를 푸는 용도 변경과 업종 특례뿐이었다. 이 문제는 건설부·상공부·과기처·경제기획원 등 거의 모든 경제부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주무 부처인 건설부는 "어느 누구도 관련법에 손대지 못한다"라며 강력 반대했다.
반도체 산업 육성에 가장 적극적인 열의를 가진 부서는 상공부였다. 상공부는 삼성전자와 머리를 맞대고 돌파구를 모색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도 삼성전자를 적극 도왔다. 수도권정비계획법에서 반도체와 PC 두 업종은 예외를 인정하자는 내용으로 반대하는 부처들을 설득했다. 끝까지 완강하게 반대한 사람은 김성배 건설부 장관이었다. 김 장관을 대신해 차관이 서명하는 방식으로 동의를 얻어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3월, 반도체와 PC 두 업종을 수도권정비계획의 공장 신증설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문서에 전격 재가했다. 대통령 권한으로 기흥 2라인 건설의 법적 족쇄를 풀어준 것이다. 대통령의 특단의 조치로 부지 문제가 해결되자 삼성은 1984년 8월 기흥 2라인 건설공사에 착공했고, 1985년 5월 준공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삼성의 기흥 2·3라인 건설 시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극도로 암담하던 때였다. 일본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덤핑 공세로 삼성은 그룹 전체가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처지에서 256KD램 양산공장을 완공하기까지는 이병철 회장의 결단, 그리고 행정 규제의 벽을 일거에 허물어준 통치권자의 결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도체 때문에 망할 뻔했던 삼성
반도체 생산 라인은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건설비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한다. 삼성의 기흥 제1라인(64KD램) 건설에는 1억 5천만 달러, 제2라인(256KD램)에는 2억 5천만 달러가 투입됐다. 제3라인(1MD램) 건설에는 무려 3억 4천만 달러가 필요했다. 이미 천문학적인 적자가 누적된 상황에서 제3라인까지 무리하게 추진하다가는 그룹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는 공포가 팽배했다.
제3라인 투자와 관련해 이병철 회장의 집무실에 쌓인 타당성 검토 보고서는 어른 키 높이에 달했다. 이 회장은 그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밑줄을 그어가며 숙독했다. 그는 "3라인을 하루빨리 착공해야 한다"고 재촉했으나, 주변에서는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판국에, 또다시 천문학적 설비투자를 감행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이 피땀 흘려 64KD램을 출하하자마자 미·일 선발 업체들은 곧바로 256KD램으로 도망치며 64KD램 가격을 폭락시키는 덤핑 공세를 퍼부었다. 256KD램을 개발해 내놓았을 때도 똑같은 치킨게임이 되풀이됐다. 1MD램을 생산한다 해도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삼성의 적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정부 일각에서는 "삼성 반도체를 국영화(공사화)하거나, 차라리 이 시점에서 사업을 접게 해야 한다"는 비관론이 쏟아졌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청와대 경제비서관실은 "그래도 반도체는 계속해야 하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삼성을 밀어줘야 한다"는 보고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올렸다.
전 대통령은 관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경제팀 건의를 수용했다. 청와대는 삼성의 제3라인 건설을 돕기 위해 1억 달러 규모의 외자 차관 도입을 전폭 주선하고 승인해 주었다. 덕분에 1987년 8월 7일, 마침내 기흥 3라인 건설이 개시되었다.
기흥 3라인 착공식은 이병철 회장이 참석한 생애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착공 3개월 뒤인 1987년 11월 19일, 그는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반도체 사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으나, 생전에는 단 한 번도 반도체 호황의 결실을 맛보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미·일 반도체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삼성은 무려 1천159억 원의 막대한 누적 적자에 허덕였다. 당시 자본금 규모를 감안하면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수준이었다. 삼성이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면 오늘날 세계를 제패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없었을 것이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벼랑 끝에 몰려 있던 한국 반도체 산업에 극적인 반전의 전기가 찾아온 것은 일본 덕분이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막강한 경쟁력으로 미국 시장을 장악하면서 대규모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했고, 미국 반도체 업계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1984년 14%에 달했던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세전 수익률은 1985년 마이너스 10%로 곤두박질쳤고, 공장 가동률 역시 70%에서 45%로 주저앉았다. 인텔마저 D램 사업 철수를 선언했다.
1985년 6월 24일,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미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일본 7대 반도체 회사를 반덤핑 혐의로 전격 제소했다. 존폐 기로에 선 미국 반도체 업계는 총결집하여 대일 공세에 나섰다. 반도체가 미국의 무역 적자를 유발하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일본에 대한 반감이 부글부글 끓던 시기에, '도시바 게이트'가 터졌다.
소련은 초정밀 가공기술이 부족해 전략핵잠수함의 추진기 소음이 심했다. 그 결과 미 해군 소나(음파탐지기)가 200마일 밖에서도 식별이 가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련 잠수함이 10마일 이내로 접근해도 탐지되지 않을 정도로 소음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은 정보망을 총 가동하여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 도시바기계가 공산권 수출이 금지된 최첨단 공작기계 8대와 수치제어 소프트웨어를 소련에 밀수출한 사실을 적발했다.
소련은 이를 타이푼 급 전략핵잠수함의 추진기 프로펠러 가공에 투입하여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격분한 미 의회는 도시바 제품의 미국 내 수입 금지를 포함한 대일 무역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1986년 3월, 일본산 반도체에 최소 21.7%에서 최대 188%의 가혹한 덤핑 마진율을 매겼다. 궁지에 몰린 일본 정부는 1986년 7월 31일,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여 제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일본 기업들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을 25% 이상 강제 감산했다. 또 미 상무부가 분기별로 제조원가를 산정해 그 이하로는 판매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공정시장가격(Fair Market Value) 제도가 도입되었다. 일본 기업들의 무기였던 '저가 덤핑'을 못하도록 묶어버린 것이다.
이 조치로 일본산 D램 공급이 급감했고, 1987년 말부터 국제 시장에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칩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일본 제품 가격이 공정시장가격에 묶인 틈을 타고 삼성은 재빨리 세계 시장을 파고들었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이듬해인 1988년, 글로벌 PC 보급 붐으로 D램 가격이 폭등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서만 무려 3천200억 원이라는 경이적인 순이익을 기록했다. 5년 동안 회사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던 1천억 원대의 누적 적자를 단숨에 털어내고 천문학적인 흑자로 돌아섰다.
통치권자의 결단으로 규제를 뚫고 세운 기흥 공장, 그룹의 명운을 걸었던 기업가의 고독한 결단, 냉전의 파고 속에서 터진 미·일 반도체 전쟁의 반사이익이 맞물리며, 한국이 세계 반도체 패권을 거머쥐는 거대한 기적이 시작되었다.
김용삼 펜앤마이크 대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