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벨기에 리드미술관이
고야 판화 '전쟁의 참화' 기증
인간의 비극 직시하고 기록한
에칭 판화 연작 41점 전시
황량하게 폐허가 된 도시. 피난 행렬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울부짖으며 프랑스군에 끌려가고 있다. 오른쪽에는 뒤를 돌아보며 우는 아이와 아이를 데려가려는 엄마가 보인다. 작품의 크기는 고작 가로 23cm·세로 16cm. 표정 하나, 옷깃 주름 하나까지 섬세한 터치로 표현해낸 이 작품은 작지만 강렬한 울림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대표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 중 하나다. 작품의 제목은 '나는 그것을 보았다'. 고야는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자신뿐 아니라 관람객 모두가 이 비극적인 장면의 목격자임을 얘기한다. 작품은 묻는다.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세계적인 거장 고야의 이 작품이 지금, 대구미술관 6전시실에 걸려있다. 대구미술관 개관 15주년 기념 소장품 특별전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는 올해 초 벨기에 선박회사 트랜스페트롤 회장이자 리드미술관 관장인 해리 루텐이 대구미술관에 고야의 '전쟁의 참화' 연작 82점 중 41점을 기증하며 성사됐다. 이 소식을 들은 HD현대중공업은 작품 운송을 후원하기도 했다.
앞서 해리 루텐 관장은 2023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렘브란트, 17세기의 사진가' 전시를 찾은 바 있다. 당시 미술관에 좋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의 소장품이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보여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했다는 게 대구미술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근 대구미술관을 찾은 야스퍼 드 페이지 리드미술관 큐레이터는 "고야의 작품을 한국에 기증하게 돼 영광"이라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아 고야 작품의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천재 화가' 고야는 기존에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 강렬한 그림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1789년 43세에 스페인 궁정화가로 임명돼 왕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부와 지위를 모두 얻은 화가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 큰 병을 앓아 청력을 잃은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전환점을 맞는다. 주문 받은 초상화뿐 아니라 자신만의 판화 작업을 시작한 것이 이 때다. 고야는 1808년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침공 당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겪은 전쟁의 비극을 판화로 기록했다.
전시에서 공개되는 '전쟁의 참화' 연작은 1810년~1820년 사이 제작됐으나 고야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작가 사후 35년이 지난 1863년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됐으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1906년 인쇄된 4번째 판본이다.
판화집은 전쟁(Guerra), 기근(Hambre), 암시적 카프리초(Caprichos enfáticos)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으며 스페인 독립전쟁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특히 고야의 판화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당시의 여느 전쟁 그림처럼 국가나 군대의 승리를 찬양하고 영웅의 관점에서 그린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고야는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과 공포를 화면의 중심에 놓고, 참상을 고발하듯 비극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냈다. 관람객들은 작품을 통해 고야가 직시했던 역사적 현장과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체감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민 학예연구사는 "리드미술관의 기증 덕분에 대구미술관이 세계적인 거장 고야의 대표 연작을 소장하고 시민들에게 선보이게 돼 뜻깊다"며 "승리자의 영웅담 대신 이름 없는 민중의 고통을 화면의 중심에 세운 고야의 서사는 200여 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14일까지 이어지며 도슨트 및 참여형 연계 프로그램이 전시 기간 중 운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