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 노룡현 부근에 있는 어떤 강
북한 대동강 서쪽 청천강 될 수 없어
지난 호에서는 고구려 살수의 위치에 대한 중국과 남북한 학계의 관점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제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료에 근거한 필자의 견해를 말해보려고 한다. 다만 1,400여 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살수의 위치를 밝히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 싣기로 한다.
◆선비족 후예 보육여견(普六茹堅)의 수나라 건국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541~604)은 수나라의 개국 황제이다. 그러나 『수서(隋書)』 고조기(高祖紀)에 따르면 양견은 풍익(馮翊) 즉 지금 중국 섬서성의 반야사(般若寺)라는 절에서 태어났고 본래의 성은 양씨가 아니라 보육여씨(普六茹氏)였다.
북주 시기에 그의 아버지가 선비족의 성을 하사받았는데 나중에 양견이 수나라 황제로 즉위한 뒤 동한 태위 양진(楊震)의 14손이라고 자칭하며 양씨로 성을 바꾸었다.
그의 아내 독고가라(獨孤伽羅)는 서위, 북주시기 명장 선비족 독고신(獨孤信, 503~557)의 딸인데 수양제 양광은 바로 독고가라가 낳은 아들이다.
당태종의 아버지 이연(李淵)은 그의 조부가 이병(李昞)이고 이병의 아내는 선비족으로서 양견의 아내 독고가라와 자매지간이었다. 그러므로 수나라와 당나라의 혈통은 순수한 한족이라기보다는 선비족의 피가 절반쯤은 섞여 있었다.
양견의 아버지 양충(楊忠)은 서위, 북주의 개국공신으로 대사공(大司空)을 역임하고 수국공(隋國公)에 봉해졌는데 양충 사후에 양견이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양견의 딸 양여화(楊麗華)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가 되었는데 선제가 죽자 나이 겨우 8세 밖에 되지 않은 정제(靜帝)가 즉위하였고 양견이 외척의 신분으로 정제를 보좌하며 점차 군정 대권을 장악해 나갔다.
581년 양견이 북주의 정제를 협박하여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어 황제에 즉위하였고 국호를 수(隋)로 바꾸었다. 대흥성(大興城) 오늘날의 서안에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고 하였다.
◆중원의 강자 수문제를 선제공격한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 영양왕
589년에 300여 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위진남북조 시대를 마감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 수문제 양견은 자만심이 극에 달한 나머지 590년 고구려 평원왕에게 수나라에 복종하지 않으면 쫓아낼 수도 있다는 다소 모욕적인 조서를 보냈다.
평원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구려 영양왕은 수문제의 무례한 행위를 괘씸하게 여기고 598년 수나라의 요서군(遼西郡)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삼국사기』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영양왕이 말갈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자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물리쳤다. 수나라 문제가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격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양세적(王世績)을 아울러 원수로 임명하여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에 한왕 양의 군대가 임유관(臨渝關)까지 왔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해 군중에 양식이 결핍되었고 또한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주라후(周羅睺)는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이용해 평양성으로 오다가 역시 풍랑을 만나서 많은 선박들이 표류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에 수나라 군사가 되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 중 팔구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자연재해로 인해 수나라 군사가 패전하여 회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전쟁의 발생 배경과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어딘지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쟁에 참전한 수나라 군인 중 살아 돌아간 숫자가 열에 팔 구명이었다면 그 참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는데, 수군의 참패를 숨기기 위해 이런 식으로 기록을 생략한 것은 아닐까.
◆중국 사료가 숨긴 제1차 수, 고 전쟁에서의 수나라 참패 원인
『수서』 고제기에서는 수나라가 전쟁에 실패한 원인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항에서는 자연재해를 수나라가 패전한 이유로 들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수나라 군대가 패전한 요인의 전부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임유관전역(臨渝關戰役)에서 "고구려 장군 강이식(姜以式)이 유수(渝水)에서 추격하여 수나라의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수품을 획득하여 개선했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주강씨족보』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실려서 베일에 가려진 옛 역사의 진상을 전해주고 있다.
◆수, 고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수문제가 중원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589년 고구려가 선제공격 할 당시 수나라는 통일한 지 채 10년이 안 된 신생국가였다. 또한 수나라의 군대는 보병이 위주여서 기병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는 많은 약점이 있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최초로 병기와 투구를 개발한 병신(兵神) 치우천왕을 시조로 하고,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고주몽을 국조로 모신 후예들로서, 600년 가까이 존속하며 무적의 군대와 선진 무기를 자랑하는 동북방의 군사 최강국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의 철갑기병, 창수, 궁수들의 늠름한 모습은 막강의 최정예 기병 부대를 거느렸던 고구려의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구려는 광개토 태왕 시기에 중원이 남북조시대를 맞아 혼란에 처한 기회를 틈타 한무제 때 상실된 발해유역의 고조선 고토를 전부 회복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광개토 태왕 비문에 보이는 "주력부대 이외의 일부 군대를 파견하여 숙신, 상곡을 관찰하게 했다(敎遣偏師 觀肅愼上谷)"라는 내용은 고구려의 영토가 서쪽으로 하북성 상곡군 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광개토 태왕 이후 영양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86년 동안 왜, 북위, 북제, 거란, 돌궐 등 이민족 세력들과 군사적 충돌은 다소 있었지만 광개토 태왕이 개척한 광대한 영토와 강인한 국력은 축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589년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했던 것은 영양왕의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승리를 계산한 준비된 공격이었다.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반격했지만 실패의 쓴잔을 마신 것은 불운의 결과가 아니라 예정된 참패였다.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는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가
수문제는 고구려를 침공하여 참패를 당한 이후 죽을 때까지 더 이상 고구려와의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를 선제공격하고 또 그들의 대대적인 반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침공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 주게 되었을까.
다음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왜 수나라 때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강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토벌에 의해 저들의 소굴이 잠시 기울어졌지만 난리 통에 가로막힌 경우가 많다 보니 저들 종족 부락들이 다시 모여들게 되었다. 지난 시대에는 냇가나 연못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널리 전파되고 또 번성하고 있다. 저들은 중국의 강토를 였보고 있으며 중국 땅을 떼어다가 동이족 무리의 것으로 만들었다.(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이것은 수양제가 수문제를 뒤이어 제1차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서 전국에 반포한 조서(詔書) 가운데 나오는 내용이다. 한나라 시대로부터 수나라 시대까지 고구려가 걸어온 변천사를 압축적으로 한눈에 보여준다.
여기서 "한나라와 위나라가 토벌했다(漢魏誅戮)"는 것은 한무제의 고조선 침략과 위나라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노룡새를 지나서 동북방 오환을 공격한 사실을 가리킨다.
"중국 땅을 떼어다가 동이족 무리의 것으로 만들었다(翦爲夷類)"라는 것은 고구려에 광개토 태왕이 출현하여 잃어버린 고조선의 한사군 땅을 회복하고 조조에게 침공당한 동북지역을 다시 원상 복구한 것 등을 말한다.
수, 당시기의 고구려는 광개토 태왕이 강역을 확대하고 고토를 완전히 회복한 뒤로서 그때 고구려의 강역은 한반도 북쪽에 국한되지 않고 중원대륙 깊숙이 들어가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중국의 수양제도 인정하였다.
다만 여기서 수양제는 "중원 땅이 동이족에 의해 잘려나갔다"라고 말했지만 동이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가 중국 땅을 무단 점령한 것이 아니라 한무제가 탈취해간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나라 요서군은 하북성 동남지역, 살수가 북한의 청천강이 될 수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고구려 왕이 말갈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다(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라고 기술하고 있고 『수서』 동이전 고구려 조항에는 "고구려 왕 고원이 말갈의 군사 만여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요서를 공격하였다(元率靺鞨之衆萬餘騎 寇遼西)"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얼핏 보면 내용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김부식의 기록은 아주 중요한 한 글자를 빠뜨렸다. 기병이란 기(騎) 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김부식이 엄청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전쟁에서 기병 1만 명과 보병 1만 명이 갖는 위력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고구려 군대가 수나라 군대를 상대로 싸울 때마다 번번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로 고구려가 보유한 무적의 철갑기병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수나라 요서군을 침공할 때 말갈 기병 만 명을 동원했다고 말했는데 정작 전쟁의 당사국인 고구려군은 한 명도 참가하지 않고 구경만 했을 리는 만무하다. 고구려 기병의 참가자는 적어도 2만 명 내지 3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때 고구려가 공격한 수나라의 요서군은 오늘날의 어디에 있었는가. 송나라 때 낙사가 쓴 『태평환우기』는 하북도 평주(平州) 조항에서 "춘추시대의 고죽국 지역이 진(秦)나라, 한나라, 진(晋)나라 때의 요서군 땅이고 수나라 때는 우북평군으로 바뀌었다"라고 적고 있다. 평주 노룡현 조항에서는 "고죽성, 조선성, 요서성 유적이 있다"라고 하였다.
『태평환우기』 하북도 영주(營州) 조항에서는 "은나라 때 고죽국 지역이고 진나라, 한나라 때는 요서군 지역인데 수나라 개황 3년 즉 수문제 양견 때 여기에 영주를 설치했다"라고 말하였다.
오늘날의 요녕성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로 나누는 것은 거란족이 그 지역을 점령하여 요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태평환우기』를 비롯한 송나라 이전의 모든 중국 사료에는 한, 수, 당 시대의 요서군은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수나라 영주를 요녕성 조양시로 인정하는 현대적 시각 또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결정적 타격을 안긴 살수대첩의 전장을 북한의 청천강으로 보는 관점은, 고구려 평양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고 서쪽 국경선은 압록강이었다고 인정하는 논리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만일 고구려가 수나라 요서군을 선제공격했는데 그 지역이 하북성 평주 노룡현 일대였다면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마주했던 곳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서쪽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수나라 때 고구려의 살수는 하북성 노룡현 부근에 있는 어떤 강이어야 하며 결코 북한 대동강 서쪽의 청천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