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만약 대구가 수도였다면? 달구벌 천도에서 AI산업 유치전까지

입력 2026-07-03 12: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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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생태계, 전력, 물, 인재 등 AI(인공지능) 산업 유치의 다양한 조건들을 갖춘 대구경북을 우리나라 지도 모양 반도체 회로의 핵심 퍼즐 조각으로 비유한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산업 생태계, 전력, 물, 인재 등 AI(인공지능) 산업 유치의 다양한 조건들을 갖춘 대구경북을 우리나라 지도 모양 반도체 회로의 핵심 퍼즐 조각으로 비유한 이미지. AI로 생성한 이미지

만약 신라 수도가 서라벌(경주)에서 달구벌(대구)로 옮겨졌다면 어땠을까? 689년 신문왕은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려 했다. 갓 통일된 신라의 국가 규모에 맞춰 좀 더 넓은 분지와 강이 있는 곳으로. 역사는 그 구상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다. 대구는 1601년(조선 선조 34년)이 돼서야 경상감영이 설치된 걸 계기로 영남 내륙의 큰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도 유치 실패 1천년 후 감영 유치 성공'이라는 역사다.

이 기록은 33년째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 '꼴찌' 신세인 대구의 역사를 다르게 상상케 한다. 만약 달구벌 천도가 이뤄졌다면, 대구는 고대 국가의 행정·군사·교통·물류가 모이는 도시가 됐을 수 있다. 신라가 발원한 경주는 왕조의 기억을 품은 문화 수도, 신라 수뇌부가 좀 더 국토의 중앙으로 서진한 대구는 국가 운영의 실질 거점이라는 역할을 각각 맡았을 수도.

물론 역사는 가정법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의 미래를 논할 때 가정법은 쓸모가 있다. 어떤 도시는 기회를 잡아 길을 바꾸고, 또 어떤 도시는 기회를 놓친 후 오랜 시간 와신상담을 한다. 대구경북의 역사는 이 두 갈래가 겹쳐진 역사다.

지금 대구경북 앞에 다시 큰 유치전이 놓여 있다. 6.3 지방선거 직후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반도체 팹(생산라인)과 데이터센터를 필두로 AI(인공지능)산업 유치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AI 생태계를 누가 먼저 지역에 심느냐의 대결이다. 이를 포함한 다양한 유치 경쟁이 상시로 이어지는 게 지방분권시대다. 대구경북은 크고작은 유치 경쟁에 임하기 앞서 과거 사례들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1996년 9월 21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위천국가산업단지 조기 지정 궐기대회 행사장. 매일신문DB
1996년 9월 21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위천국가산업단지 조기 지정 궐기대회 행사장. 매일신문DB
위천국가산업단지 촉구 범시민궐기대회가 30년 전이었던 1996년 9월 21일 대구 두류공원야구장에서 문희갑 대구시장을 비롯한 3만여명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매일신문DB
위천국가산업단지 촉구 범시민궐기대회가 30년 전이었던 1996년 9월 21일 대구 두류공원야구장에서 문희갑 대구시장을 비롯한 3만여명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매일신문DB
1996년 9월 21일 위천국가산업단지 지정 촉구를 위한 범시민 궐기대회에 참석한 당시 문희갑 대구시장. 매일신문DB
1996년 9월 21일 위천국가산업단지 지정 촉구를 위한 범시민 궐기대회에 참석한 당시 문희갑 대구시장. 매일신문DB

◆위천이 남긴 20년 공백

대구경북의 유치 실패사를 거론할 때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위천국가산업단지다. 1990년대 대구는 달성군 위천 일대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려 했다. 섬유산업 다음 성장 동력을 찾는 절박한 카드였다. 산업용지가 부족했고 대기업과 첨단산업을 유치할 공간도 필요했다. 자동차, 전자, 생명공학 같은 산업군이 대구의 미래로 거론됐다.

하지만 위천은 낙동강 수질 문제를 가리킨 하류 부산·경남의 반발과 중앙정부의 신중론 속에서 끝내 현실화되지 못했다. 지역 대결 구도에서 밀린 패배로도 기억된다. 대구경북은 2009년 달성군 구지 일대 대구국가산업단지 유치로 긴 공백을 일부 메웠지만, 무려 20년 뒤의 성과였다.

즉, 놓친 건 부지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산업은 제때 모여야 생태계가 된다. 큰 기업은 주변에 작은 기업군을 부르고, 인재는 일자리를 따라 움직이며, 대학과 연구기관은 산업 현장 수요에 맞춰 진화한다. 위천이 좌절된 뒤 대구가 잃은 건 섬유 다음 산업으로의 전환 속도였다. 그래서 위천은 지금도 대구경북 언론과 정치권이 대형 국책사업 유치전 때면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그때 놓친 20년"이라는 표현은 지역사회가 체감한 상처의 요약이다.

현재 AI산업 유치전에서 위천은 재소환된다. AI데이터센터와 AI컴퓨팅센터, AI반도체 후공정 시설, 제조AI 실증단지, 로봇 테스트베드, 의료AI 플랫폼 등은 모두 이름은 다르나 공통점이 있다. 제때 잡지 못하면 다음 단계의 생태계가 다른 지역에 먼저 굳어진다는 것. 그래서 위천의 교훈은 단순히 "이번엔 무조건 따오자"가 아니라, "부지와 명분, 환경과 주민 수용성, 기업 수요와 운영 모델을 함께 확실히 준비하자"가 된다.

2000년 11월 10일 정부의 부실기업 퇴출(청산) 결정에 삼성상용차가 포함되자 대구의 삼성그룹 모태 옛 삼성상회 자리에
2000년 11월 10일 정부의 부실기업 퇴출(청산) 결정에 삼성상용차가 포함되자 대구의 삼성그룹 모태 옛 삼성상회 자리에 '안티삼성'이라는 낙서가 적혔다. 매일신문DB
1996년 3월 6일 대구 달성군 소재 쌍용자동차 구지 출고 사무소 개소식 현장. 매일신문DB
1996년 3월 6일 대구 달성군 소재 쌍용자동차 구지 출고 사무소 개소식 현장. 매일신문DB

◆자동차 도시 대구도 좌절

위천의 좌절은 자동차 산업 벨트 구상과도 맞물렸다. 1990년대 대구는 삼성상용차, 쌍용자동차 구지공장, 위천국가산업단지를 잇는 산업 지도를 꿈꿨다. 섬유도시에서 기계·자동차 부품도시의 변신을 내다봤다. 대구 성서~구지~달성을 연결하는 산업축이 만들어졌다면 지역 중소 부품업체와 기술 인력이 동반 성장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이 구상을 흔들었다. 쌍용차 구지공장 계획은 무산됐고, 삼성상용차도 1996년 대구에 설립된 본사가 2000년 파산하는 길을 걸었다. 두 회사가 살아남았다면, 대구는 훨씬 일찍 미래차와 모빌리티 부품 도시의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1999년 7월 19일 대구 삼성상용차 공장 생산라인 모습. 매일신문 DB
1999년 7월 19일 대구 삼성상용차 공장 생산라인 모습. 매일신문 DB

2007년 로봇랜드 유치전도 따져볼 사례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함께 유치에 나섰으나 인천과 경남 마산(현 창원)이 사업을 차지했다. 당시엔 아쉬움이 컸는데, 시간이 흐른 뒤 두 지역 로봇랜드는 운영난과 재정 부담을 겪으며 사업 자체가 표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꽤 지나고 보니 로봇을 주제로 테마파크와 연구 기능을 결합한 콘셉트에 짙은 물음표가 향한다. 지금 로봇산업은 피지컬AI 시대로 향하며 테마파크보다는 로봇이 데이터를 학습할 다양한 산업군 공장을 가까이에 두는 게 정답이기 때문이다.

두 사례가 주는 교훈은 엇갈리면서도 하나로 모인다. 자동차 산업 벨트는 대구가 잡았다면 지역의 산업 체질을 더 일찍 바꿨을 기회였다. 반면 로봇랜드는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잡지 못한 게 오히려 부담을 피한 선택처럼 보인다. 결국 유치 경쟁력은 모든 사업을 따오는 능력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와 맞는 사업을 골라내는 판단력이다.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는 놓치지 않아야 하고, 유행어만 앞세운 사업은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AI산업도 마찬가지다. 대구경북에 필요한 것은 이름만 그럴듯한 AI 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제조·의료·물류·로봇·소프트웨어 기반과 실제로 연결돼 다음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사업이다.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혁신도시. 매일신문DB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혁신도시. 매일신문DB

◆유치 성공 뒤엔 늘 숙제가

대구혁신도시와 김천혁신도시는 공공기관 지방 유치라는 큰 성과를 냈다. 그 평가는 유치한 기관들의 이름값 합산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역 언론이 꾸준히 던지는 "기관은 왔지만 사람은 남았나?"라는 질문이 더 큰 배점의 평가 문항이다. 여러 공공기관·공기업이 왔지만 지역 기업과 제대로 연결됐는지, 이전한 기관 직원들의 생활이 지역에 뿌리내렸는지 등의 질문들 앞에서 혁신도시는 성과와 한계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대구경북 내에서 이뤄진 일이기는 하지만 경북도청신도시도 비슷한 숙제를 남기고 있다. 경북 북부권 균형발전의 상징으로 경북도청을 안동·예천으로 옮겼지만, 현재 인구 2만3천명대에 머무르며 계획인구 10만명 규모 자족도시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행정기관에 기업과 대학, 상권과 문화가 함께 와야 도시가 완성된다. 도시를 옮기는 일은 청사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밀도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혁신도시 내 상가 건물에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매일신문DB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혁신도시 내 상가 건물에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매일신문DB

닮은꼴 과제가 AI산업을 유치한 해외 지자체에서 나타나 분석 대상이 됐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회 산하 조사기관인 공동입법감사검토위원회(JLARC)는 2024년 12월 '버지니아의 데이터센터'(Data Centers in Virginia) 보고서에서 데이터센터 산업의 경제효과가 주로 운영 단계보다 초기 건설 단계에서 나온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통상 25만ft²(제곱피트) 규모 데이터센터는 상시 근무 인력이 50명 수준이지만, 공사 절정기에는 1천500명이 투입된다. 데이터센터 1개 동을 짓는 데 12~18개월이 걸리고, 이 기간 토목·전기·냉각·배관·통신·보안 설비 공사가 한꺼번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역 언론이 혁신도시의 탄생부터 10년 넘게 지켜본 기록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혁신도시 역시 조성 과정에서는 토지 보상, 기반시설 공사, 청사 건립, 아파트와 상가 개발로 지역에 돈이 돌았다. 그러나 개발 과정의 활기가 곧 정착 이후의 생태계를 보장한 건 아니었다. 공공기관 건물은 들어섰지만 직원 가족의 정주, 지역 대학과의 협력, 지역 기업과의 상생, 청년 일자리 창출 같은 게 충분히 따라붙지 않으면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조성 초기 대규모 투자가 지역에 돈을 돌게 만드는 건 두 팔 벌려 반길 일이지만, 그것만 있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매일신문DB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매일신문DB
대구간송미술관 현장 티켓팅 행렬. 매일신문DB
대구간송미술관 현장 티켓팅 행렬. 매일신문DB

◆브랜드도 인프라

대구경북에 유치 실패 사례 내지는 애매한 성과만 있는 건 아니다. 상징적인 유치 성공 사례도 꾸준히 이어졌다.

대구간송미술관이 대표적이다. 간송미술관의 첫 지역 분관이자 상설 전시 공간이 대구에 문을 연 것은 단순한 문화시설 개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대구는 2021년 이건희미술관(이건희기증관) 유치전에선 고배를 마셨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의 출발지,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 한국 근대미술의 한 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서울의 승리였다. 이 기억만 남았다면 대구의 문화예술 인프라 유치 이력은 수도권 집중 앞에서 좌절한 기록으로 굳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구간송미술관이 다른 결을 만들었다. 건립 협약(2015년)부터 실제 개관(2024년)까지 불확실하고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대구는 국보급 문화자산을 서울만큼 품을 수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문화유산은 공장처럼 곧바로 매출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방문의 이유를 형성하며, 관광과 교육의 결합 가능성도 남긴다. 지역 예술가와 시민들의 자부심도 한층 높인다. 미술관 유치 성과를 단기 경제효과로만 재단하면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경주 APEC 정상회의 유치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경주는 천년고도라는 오래된 서사를 국제 외교 무대로 연결시켰다. 역사도시는 과거에 머무는 공간이라는 통념을 넘어 세계 정상과 기업인들이 찾는 회의 도시의 이미지를 드높였다. 마침 미중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행사가 열리며 경주가 더 주목받은 건 좋은 덤이었다. 이 역시 행사 기간의 경제효과보다 앞으로 구축할 보이지 않는 자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된다.

두 사례는 AI산업 유치전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기업과 인재는 전력과 부지만 보고 움직이지 않는다. 도시 이미지, 생활환경, 문화적 매력, 국제적 인지도도 투자와 정착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대구간송미술관과 경주 APEC은 산업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도시 브랜드 인프라 대표 사례라고 얘기할 수 있다. 더 있으면 좋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체급이 비슷한 후보지끼리는 여기서 당락이 갈릴 수도 있다.

지난해 10월 29일 오후 경북 경주시 월정교 수상 특설무대에서 열린
지난해 10월 29일 오후 경북 경주시 월정교 수상 특설무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5 대한민국(KOREA) 한복패션쇼'. 매일신문DB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이었던 지난해 10월 29일 국립경주박물관 중정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이었던 지난해 10월 29일 국립경주박물관 중정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