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 한 장이 멈춰 세운 시간은 1975년 여름, 대구 근교의 어느 호젓한 시골마을 골목길.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아이들 웃음소리로 늘 시끌벅적했다.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만 가면 코에 콧물이 말라붙은 개구쟁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국민학교 3~4학년 또래였던 철수는 여전히 코가 훌쩍 밀려 나와 있고, 그 옆에서 단돈 몇 원에 행복을 사서 '아이스깨끼'를 입에 문 영훈이와 용진이의 얼굴에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만족감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름조차 다 기억나지 않지만 옷 한 벌 번듯하게 받쳐 입지 못해 윗도리를 훌러덩 벗어던진 아이도 있고, 해진 옷을 입은 친구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자란 얼굴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무릎이 터진 반바지를 입었고, 누군가는 여름 내내 런닝셔츠 한 장으로 지냈다. 고무신 뒤축은 닳아 있었고, 얼굴에는 검게 그을린 햇볕 자국이 선명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웃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환했다.
영훈이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 온 '아이스깨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비닐 속 얼음을 이로 깨물어 먹으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 맛 하나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친구들은 한입만 달라며 달려들었고, 결국 얼음은 금세 반 토막이 났다. 간식거리라곤 밭에서 따온 오이나 가지가 전부였다.그래도 누구 하나 싫은 내색이 없었다. 없는 형편에도 늘 나누어 먹던 시절이었다.
철수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배를 잡고 넘어갔다. 이유도 크지 않았다. 그냥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흙먼지 날리는 골목, 멀리서 들려오는 소여물 끓는 냄새, 어머니들이 부르는 저녁밥 소리까지 모두가 아이들의 하루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는 가난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동네 대부분이 비슷하게 살았고, 서로의 형편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도시락 반찬이 없어 간장에 밥을 비벼 먹고 학교에 가던 날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냇가에서 멱을 감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기억은 지금도 반짝인다. 가진 것은 적었어도 웃음은 많았고, 마음은 넉넉했다.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어느덧 중년의 아저씨가 될 나이가 되었지만, 오래된 흑백사진 속 그 웃음만은 아직도 멈춰 서 있다.세상은 몰라보게 풍요로워졌고, 대구 근교의 그 시골 마을들도 이제는 번화한 도시의 일부가 되었거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아무 걱정 없이 깔깔거리던 그 여름날의 골목은, 가난마저 추억으로 바꾸어 놓은 어린 시절의 천국이었다.
동상 작품인 이안숙의 "개구장이"처럼 "당신은 지금 이 아이들처럼 아무런 계산 없이, 온 마음을 다해 활짝 웃어본 적이 언제인가요?"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부유했던 1975년의 그 골목길. 그곳에서 피어나던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가 오늘따라 가슴 아리도록 그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