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수다]갓 쓰고, 비녀 꽂고…외국인 유학생들 "대구 와서 어른 됐어요"

입력 2026-05-22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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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구계서원서 25년동안 이어온 전통 성년례…"한복 입으면 피부색 달라도 예쁘고 멋져요"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지난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여학생이 족두리를 쓰는 계례(笄禮)를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지난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여학생이 족두리를 쓰는 계례(笄禮)를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바이자코바 아르우케의 새로운 이름은 '류은'이니라. 균형을 맞추며 은은하게 빛나는 삶을 사는 커뮤니케이터가 되어라." 주례자의 목소리가 서원 마당에 울려 퍼졌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키르기스스탄 출신 여학생 아르우케(20·영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1학년)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새 이름을 받은 순간,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옆에서는 이집트에서 온 청년이 상투를 틀고 갓을 썼다. 도포 자락을 여미는 손이 살짝 떨렸다. 피부색도, 모국어도 달랐지만 한복을 갖춰 입은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의젓했다. 모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어른이 된 날이었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지난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여학생이 족두리를 쓰는 계례(笄禮)를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지난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여학생이 족두리를 쓰는 계례(笄禮)를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2001년부터 이어온 전통…외국인 참가자만 200여 명

지난 11일 오전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 우즈베키스탄·방글라데시·이집트·키르기스스탄·부탄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복을 갖춰 입고 마당에 들어섰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한국의 전통 성인 의례인 관례(冠禮)와 계례(笄禮)를 직접 체험하는 자리였다.

아직 앳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의식이 시작되자 표정이 달라졌다. 여학생들은 머리에 족두리를 얹고 비녀를 꽂았다. 남학생들은 도포를 갖춰 입고 갓을 썼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관례는 15세에서 20세 사이의 남성에게 상투를 틀고 관(冠)을 씌워주는 성년 의식이다. 학식과 덕을 갖춘 어른을 빈(賓)으로 모시고, 세 차례 옷을 갈아입는 삼가례(三加禮)를 행한 뒤 성인 이름인 자(字)를 부여받는다. 계례는 여성에게 땋은 머리를 풀어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아 성인이 되었음을 공인하는 의례다. 이날 참가자들은 평상복·외출복·관복을 차례로 갈아입고 술을 마시는 예절까지 익히며 의식의 전 과정을 몸으로 배웠다.

영남대는 2001년부터 매년 5월 성년의 날마다 이 행사를 이어왔다. 지금까지 관례와 계례를 체험한 외국인 유학생만 200여 명이 넘는다. 국내 대학 중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전통 성년 의례를 정례 행사로 운영하는 사례는 드물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방글라데시·부탄엔 이런 의식이 없어요"

참가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놀라움, 그리고 감동이었다. 계례에 참가한 부탄 출신 유학생 데마타시(31·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사 1기)는 "한국에 이런 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는데, 비녀를 꽂는 순간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출신 파르하나(23·생명공학과 2학년)는 "방글라데시에는 이런 형식의 성년 의식이 없다"며 "의식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국 문화를 오늘 다시 봤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이스마토브 굴럼(24·경제금융학부 3학년)은 "책에서 읽는 것과 직접 입고 체험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며 "이 경험이 유학 생활 전체를 통틀어 가장 특별한 기억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크마르 이슬라모브(20·시각디자인학과 3학년)는 "의식을 직접 치러보고 나서야 한국 전통문화 안에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셀카 촬영을 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한복을 입으면 피부색이 달라도 잘 어우러져

한복은 이날 의식의 중심이었다. 처음 입어보는 한복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외국인 유학생들은 옷고름을 여미고 자리에 앉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화려한 색감의 당의와 도포는 단순한 의상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의 첫 관문이었다. 전통적인 색감과 선(線)이 살아 있는 한복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의 몸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복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 됐다. 고궁과 전통 마을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의 사진이 SNS에서 활발히 공유되고,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한복 체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날 구계서원에서 한복의 의미는 달랐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입은 옷이 아니었다. 수백 년 된 예법 안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갖춰 입은 옷이었다.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제54회 성년의 날을 맞아 11일 경산 영남대학교 민속촌 내 구계서원에서 열린 전통 성년례 행사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년례를 치르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이병준 영남대 부총장은 "K컬처 열풍과 한국에 대한 높은 호감도가 대구 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한복을 입고, 절을 하고, 이름을 받는 과정을 직접 겪고 나면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 부총장은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어른이 되는 날, 수백 년 된 한국의 예법이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이 행사의 의미"라고 덧붙였다.

행사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한복을 입은 채 서원 마당에 나란히 섰다. 갓을 쓴 청년 옆에 비녀를 꽂은 여학생이 어깨를 맞댔다. 저마다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표정만큼은 한결같았다. 카메라 앞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색하게 여몄던 도포 자락도, 처음 얹어본 족두리도 이제 조금은 익숙한 듯 보였다. 이날 외국인 유학생들은 대구에서 어른이 된 첫날을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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