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울 대학에 진학했다. 소위 '취업이 보장된다'는 명문대 공대였다. 첫 직장은 공기업. 이후 그 경력을 바탕으로 연 매출 1조원대 반도체 기업으로 이직해 개발직군으로 일했다. 누군가에겐 탄탄대로로 보이는 이력이다. 하지만 그는 돌연 퇴사를 선택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내려오자 주변에서는 "창업이라도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2024년, 그는 버스 기사가 됐다.
바야흐로 취업 시즌. 고용 한파를 넘어 '취업 빙하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1990~2000년대생 청년들 사이에서는 "열심히 준비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푸념이 낯설지 않다. 유망하다는 말에 뛰어들면 열풍이 채 식기도 전에 인공지능(AI)이 대체를 이야기하고, 한때 '안정적'이라 불리던 직업도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스펙을 쌓아도 문은 더 좁아졌다.
이런 시대, 일부 청년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성별의 경계를 넘고, 나이의 기준을 깨며 '남들이 정해준 길' 대신 자기 기준으로 직업을 고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들이 정한 길보다, 내가 오래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 역시 하나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청년들이 더 이상 '정답'이라 불리던 길만을 좇지 않는다는 점이다.
◆ 취업 '정석' 보단 나의 '만족'
이승준 씨(29)는 2년차 버스기사다. 한양대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하고 고연봉 취업까지 했던 그에게 "왜 이 직업을 선택했냐"는 질문은 늘 따라붙는다. 전공을 살려 취업했지만, 보수적인 조직 문화가 걸림돌이 됐다. 이 씨는 "개발직군은 개인의 성과가 중요한데도 상명하복식 문화 속에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해갔다"며 "성장이 정체된다는 느낌이 컸다"고 말했다. 40대 중반 이후 희망퇴직이나 권고사직을 마주하는 업계 현실도 고민이었다.
반면 버스기사는 정년이 보장되고 근무시간이 명확해 워라밸을 지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수평적인 분위기도 매력으로 느껴졌다"며 "겉으로 보기엔 있어 보이는 직업이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터전"이라고 했다.
버스기사는 교대 근무 체계로 하루 운행 시간이 비교적 명확하다. 야근이나 불규칙한 초과근무가 잦은 일반 사무직과 달리 일정이 안정적이다. 정년 역시 60세 이상으로 길어 장기적인 생계 설계가 가능하다. 직장 내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이 씨는 "사무직은 환경이 쾌적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며 "혼자 운행한다는 특성도 요즘 젊은이들이 버스기사로 눈을 돌리는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버스기사는 직장 상사·동료와 부딪히지 않고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다. 노선 안내나 인사같은 기본적인 응대 외엔 승객과 대화할 일도 많지 않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30세대 버스 기사는 2022년 7천559명에서 2025년 1만234명으로 3년 사이 약 37% 증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청년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맞닿아 있다. 과거 버스 기사는 하루 15시간 이상 운행한 뒤 다음 날 쉬는 '격일제' 근무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준공영제 도입 이후 '2교대제'로 전환된 지역이 늘면서 근무 여건도 개선됐다. 일반 사무직처럼 하루 9시간 안팎으로 일하고, 주 5일 근무에 주당 근무시간은 40~50시간 수준인 곳이 많다.
이 씨는 "이전에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스 운행을 시작하며 내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기쁘게도, 혹은 슬프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의 발'이 되어 누군가의 여정을 돕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남들 시선 뭐가 중요해요"
요즘 청년들은 직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선'도 가볍게 넘는다. 성별에 따라 나뉘던 직업의 경계 역시 흐려지는 모습이다.
김보라 씨(21)는 특수용접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여성 용접사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앉아서 하는 일은 맞지 않았고,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선택이었다.
용접은 좀처럼 여성 기술자를 찾아보기 힘든 대표적인 금녀의 영역으로 알려진다. 웬만한 남성도 견디기 힘든 체력적 부담과 그보다 더 힘들다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실제 현장은 녹록지 않았다. 여성 용접사가 드문 탓에 숙소나 근무 환경에서의 불편함은 물론, 체력적인 한계와 주변의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김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대를 더 크게 받거나, 반대로 '왜 굳이 힘든 일을 하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서 감수해야 할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김 씨는 "한창 꾸미고 싶은 나이인데 방진마스크 마찰로 여드름이 잘 생기고, 파마를 해도 안전모나 용접면에 눌려 금방 풀린다"며 "작업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겪는 일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힘든 날에는 퇴근하고 눈물로 보낸 적도 많지만, 그만큼 버텨온 나 자신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며 "지금은 배우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남성 네일아티스트 손기환 씨(42)의 선택도 같은 맥락이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접한 네일아트에 흥미를 느끼며 이 길에 들어섰다. 그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성 네일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시작부터 장벽이었다. 예약까지 하고 찾아왔다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돌아간 손님도 있었다. 그는 "이해는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 고객의 취향을 이해하기 위해 패션과 디자인을 따로 공부하고, 트렌드를 꾸준히 분석했다. 노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손 씨는 "손님들이 '지금까지 받아본 곳 중 가장 낫다'고 말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남자라는 점이 오히려 차별화된 강점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네일을 받고 나서 남자친구에게 '예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전해주는 고객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공통된 기준은 분명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가'다. 김 씨도 손 씨도 말한다. "돈도 중요하지만, 결국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관심과 재미를 따라가다 보면 실력은 쌓이고, 그것이 결국 나만의 경쟁력이 된다"
◆ 사무실 밖으로… 블루칼라 재발견
사무실 대신 현장을 선택하는 20~30대 청년들도 늘고 있다. 기능직·운송·물류 등 이른바 '블루칼라' 직종으로의 유입이 눈에 띄는 흐름이다. 과거에는 현장직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고용 안정성과 근무 유연성 측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일자리로 재평가되고 있다.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선호 직종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박세라 씨는 23세에 주택금융공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하고 자동차 정비사의 길을 택했다. 고졸 상태에서 공기업 정규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주변에서 '안정적인 선택'을 포기한 사례로 여겨졌다. 하지만 박 씨의 기준은 달랐다.
그는 "반복적인 행정 업무를 하면서 '이 일이 과연 나에게 맞는가'라는 고민이 컸다"며 "내 능력으로 직접 결과를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보상을 얻는 일이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무직보다는 경험과 기술을 쌓아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고 덧붙였다.
부모와 지인들의 만류도 이어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편해질 텐데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느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퇴사를 선택했다. 이후 6개월간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 과정을 수료한 뒤 곧바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변화하는 노동시장 속에서 블루칼라 직종을 새로운 대안으로 삼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5년차 자동차 정비사로 근무 중인 황신원 씨(27)는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흐름 속에서도 정비는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고 본다"며 "기술은 평생 내 것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황 씨는 전공을 바꾼 사례다. 실용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뒤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자동차 정비에 흥미를 느끼며 진로를 전환했다. 이후 미래자동차공학과 야간 과정에 진학해 현재 4학년 심화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몸은 힘들지만 지금의 삶이 더 만족스럽다"며 "회사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는 점에서 훨씬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실제 한국고용정보원이 한국직업정보에 있는 520개 직업을 대상으로 2024년과 2027년의 AI에 의한 직무 대체율을 분석한 결과, 화이트칼라가 비(非)화이트칼라보다 더 급격하고 강력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과거 자동화에 취약할 것으로 여겨졌던 현장직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덜 대체되는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일자리 시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최근 변화는 긍정적인 현상"이라며 "개인이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용가능성'을 어떻게 키워나가느냐가 중요한 변수"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