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투표율 85.3%, 찬성율 78.8%로 통과
의원 내각제 폐지,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매일신문 1월1일 신년 인터뷰에 게재된 박 의장
64년 전인 1962년 12월 17일은 제 3공화국의 기틀이 될 제 5차 헌법개정안의 가부(可否)를 묻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가 전국 7117개 투표소에서 실시됐다.KTV 아카이브 '새 헌법에 국민투표'영상을 보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각자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려 긴 줄을 서 있다. 줄을 서서 담배를 피는 중년 남성과 포대로 아기를 업고 있는 새댁도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유권자들은 한명씩 본인 확인을 거친 후 흰 천으로 가려진 기표소 안에서 찬반투표란에 기표한 후 투표함에 넣는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육영수 여사도 나란히 투표함에 용지를 넣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첫 국민투표는 어떻게 치뤄졌나?
군사정변 후 민정이양을 위한 첫 국민투표의 결과는 투표율 85.3%, 찬성율 78.8%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절차적 정당성을 얻은 이 헌법은 12월26일에 공포됐으며, 이듬해에 대통령 선거(10.15)와 제6대 총선이 치뤄졌다.
첫 국민투표는 큰 무리없이 끝났지만, 그 배경을 보면 그리 달갑지는 않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제3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정당성을 얻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61년 박정희 군부는 5월 16일 이후 내각 총사퇴와 함께 국회를 해산함으로써 장면 정권을 무너뜨렸다.
군사정변과 함께 비상계엄을 선포해 헌법의 효력도 상실시키고, 군사혁명위원회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중심으로 비상조치법에 따라 국정을 운영했다. 1962년 7월부터는 최고회의 위원들과 학자,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한 헌법심의위원회에서 새 헌법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이 새 헌법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국민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제3공화국 헌법 개정의 핵심은 제2공화국의 의원 내각제를 폐지하고, 부통령을 없애는 등 사실상 미국식에 가까운 대통령 중심제로 운영하자는 것이다. 국무총리도 국회의 동의없이 임명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이었던 국무회의도 단순 심의기관으로 권한을 축소했다.
◆朴 의장의 매일신문 신년 인터뷰
"대한민국 국민의 최대 행복을 추구합니다."(1월 1일자 1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 정변 이듬해의 첫날 매일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 파격적으로 나왔다. '김영호 본사 사장과의 신년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지면을 통해 새해 덕담 겸 정국 구상을 밝혔다.
박 의장은 인터뷰 시작과 함께 "김 사장,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대구는 모두 어떻습니까"라고 안부를 물었다. 인터뷰가 진행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테이블 위에는 고급 찻잔과 팔각형의 성냥통 그리고 커다란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새해를 맞아 혁명정부의 국정운영 6가지 방향타를 제시했다. ▷반공태세를 재정비하고 강화한다 ▷UN 헌장을 준수하고,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화한다 ▷부패를 청산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립 및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통일 실력을 배양한다 ▷주요 관직의 민정이양 등
박 의장은 '인간개조론'을 들고 나와 "이번 혁명은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행복한 장래를 보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각자 노력해 국가적 성과를 최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지방자치'에 대한 신념도 밝혔다. "건전한 민주정치는 건전한 지방자치에서 출발합니다. 대구가 앞장 서 주십시오."
박 의장은 5·16 군사정변 이후 어떻게 정국을 안정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했으며, 나라 발전의 큰 틀과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연구했다. '산업화의 영웅'이자 '쿠데타, 독재자'라는 빛과 그늘을 다 가진 박 의장은 제3공화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첫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