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의 장소의 사색] 나의 침실로

입력 2026-04-08 09: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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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루.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되려 아름답다.
관풍루.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되려 아름답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서, 그리고 너무 쉬운 상대여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는 존재들
이 있다. 사람도 있고 장소도 있다. 대구시 중구 달성동에 있는 달성공원도 그런 존재다. 달성공원은 현존하는 고(古) 토성(土城) 중에서 가장 그 원형이 잘 보존된 도심 성곽이다.

옛날부터 대구 지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존속해 왔다. 내가 생각하는 달성토성의 소중함은 그런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서 한국 근대사의 한 중요한 좌표를 찍은 장소라는 점에서도 귀한 존재다.

석주 이상룡 순국기념비
석주 이상룡 순국기념비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상화시비.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다.
상화시비.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1948년) 시비(詩碑)가 세워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 이전에는 개인 시비를 세운 역사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상화 시비(尙火詩碑)가 그것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 달성공원의 상화 시비를 만났다. 비면에 새겨진 「나의 침실로」라는 시가(그때는 시인 줄 몰랐다) 참 그로테스크했었다. 내용은 물론이고 검은 비면에 새겨진 삐뚤삐뚤한 글자들도 은근 무서웠다. 나중에 그것이 상화의 초등학생 아들이 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어쨌든 그 시는 해독이 안 되는 기이한 문서였다. 그 무렵 거의 매일 그 검은 비석을 대면해야 했는데(그 비석 아래에 아버지 가게의 공원 분점이 차려져 있었다) 뜻도 모르면서 "마돈나! 나의 침실로 가자"를 입속에서 웅얼거리곤 했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때 문학의 신이 내 안으로 들어왔지 싶다.

그 무렵 교내백일장에서 내가 최연소 입선자가 되어 100년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학교 문예지에 내 작품이 실렸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그 시비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마돈나가 누군지, 우리가 엮는 꿈은 무엇인지, 목숨의 꿈은 또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지만 비석에 새겨진 그 구절을 따라 읽다 보면 간절하고 애절한 그 어떤 느낌이 전달되곤 했다. 6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구절을 볼 때마다 역시 아련한 느낌이 든다.

달성공원에는 이상화 시비 이외에도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 석주 이상룡선생 순국기념비, 동학 창시자 최제우선생 동상 등 대구 경북 지역의 높은 정신을 대표하는 위인들을 기리는 탑들이 즐비하다(어린이헌장비 등 두어 개의 다른 탑도 있다). 아마 단일 사적지 공간 안에 이렇게 많은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곳은 전국에서 달성공원이 유일하지 싶다.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1601년에 건립된 관풍루(觀風樓)도 이곳으로 이전해 잘 보존되고 있다. 1906년 이전 당시 새 부재가 많이 들어갔지만 목재 건물의 특성상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달성공원이 대구 지역에서 차지하는 정신사적 비중이 엄청 큰 것임을 나타내는 증표들이라 하겠다.

봄나들이 나온 어린이집 원생들
봄나들이 나온 어린이집 원생들

몇 마디 달성공원과 관련된 내 개인적 소감을 덧붙인다면 다음과 같다. 요즘 달성공원을 달성토성으로 부르는 일이 잦다. 일요일 새벽부터 서는 공원 앞 번개시장도 토성 새벽장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나도 소설 《레드빈 케이크》를 쓸 때 달성공원 대신 토성이라는 명칭을 썼다. 소설이다 보니 구체적인 지명보다는 그런 두루뭉술한 이름을 쓰는 것이 타 지역 독자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달성공원도 달성토성 못지않게 좋은 이름인 것 같다. 공원(公園)은 자의(字意)로는 '공공의 정원'이며 '자연 상태를 잘 보존하여 국민(시민)의 휴양처로 지정한 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권재민적 차원에서 볼 때 적절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위락시설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사정이 있어서 달성공원이라는 말이 달성토성보다 조금은 하품인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서울의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된 것처럼 달성공원도 예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도록 향후 잘 관리하면 괜찮을 것 같다. 조만간 동물원도 시 외곽지역으로 이전할 것이라 하니 대구 정신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달성공원이 더 좋은 모습으로 환골탈태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삼성상회터
삼성상회터

하나 덧붙일 말이 있다. 달성공원의 정기(精氣)에 관한 이야기다. 대구가 배출한 유명 인사들 중에는 달성공원의 정기를 받아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많다. 우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그룹 삼성의 출발지가 달성공원 앞이다. 북구 칠성동에 있는 창조경제구역(옛 제일모직 자리)은 그 다음으로 삼성의 출발지 역할을 했다. 삼성이 그 장소를 여태 다른 용도로 쓰지 않고 보전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삼성 라이언즈가 대구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것도 그 까닭에서다. 달성공원이 없었으면 지금의 삼성도 없다는 게 내 뚜렷한 주관이다. 그리고 삼성의 2대 총수였던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도 그 근처 서성로에 있다.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 태생이다. 그러나 이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는 달성군 하빈의 박팽년 후손이다. 그 동네에 가면 삼성의 성공은 전적으로 묫골 박씨를 처가로 둔 덕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집안 어른들에 따르면 친가 쪽도 물론 3000석 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를 지닌 집안이었지만 외가 쪽 지체가 워낙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 실제 어머니는 시집 올 적에도 몸종을 비롯하여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라고 이맹희 회장의 회고록에 적혀 있다.

그 다음은 배우 신성일 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때 신성일 배우는 방탄소년단 일곱 명을 다 합쳐도 따라오지 못할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그 신성일 씨가 달성공원 앞에 있는 수창초등학교 출신이다. 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달성공원의 정기를 받아서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다. 대구 출신 유명, 유력인사들 중의 태반이 달성공원의 정기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대구가 좁은 지역이었다는 말도 되겠다. 요즘은 범4만3(범어4동, 만촌3동)이 좋은 학군지역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옛날에는 달성공원을 끼고 있는 달성동(동쪽), 대신동, 수창동, 서성로가 1급지이고 조금 떨어진 종로, 남산동, 삼덕동이 2급지, 꽤 떨어진 칠성동, 대명동, 신암동은 3급지로 간주되었다. 1급지 지역에서 명문중학교에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래서 위장전입을 하거나 아이들만 따로 방을 얻어 1급지에서 숙식을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골에서도 5,6학년이 되면 그쪽 학교로 전학을 많이 왔다. 그때는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인데 학교에 따라 명문중학교 합격자 수가 두세 배씩 차이를 보였다. 달성공원 앞 수창초등학교가 대구시내 초등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곤 했다. 모두 다 달성공원의 정기 덕분이었던 것이다. 웃지 못 할 일은 중학교 무시험진학이 실시되면서 서울과 각 지역의 명문 중학교가 폐교되었다. 대구에서는 경북중, 경북여중이 그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일제강점기 대구신사 앞을 지키던 가이즈까 향나무들.
일제강점기 대구신사 앞을 지키던 가이즈까 향나무들.

또 한 마디. 어릴 때 같이 자란 친구 중에 달성공원 앞 목욕탕집 친구가 있었다. 나중에 대
학교수,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친구가 언젠가 자신의 무용담을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유명 정치인이 된 고등학교 친구 아무개가 운동권 시절 모종 사건에 연루되어 쫒기고 있었다.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는데 내가 그를 도왔다. 우리집 대형 목욕조의 물을 빼고 그 안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했다"고 적은 것이다. 지형지물을 잘 활용해 친구를 숨겨준 목욕탕집 친구도 그렇고 거기서 하룻밤 몸을 피하고 무사했던 그 유명 정치인 친구도 달성공원의 정기를 톡톡히 내려 받은 당사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 친구들이 잘 되어도 너무 잘되었기 때문인데, 이 나이 먹고도 그 말 말고는 다른 어떤 말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소설가·대구교육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