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빠진 미식축구와 평생 인연 이어
43년 간 경북대 미식축구팀 감독으로 활동
박 교수, "미식축구 박물관 설립이 남은 꿈"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박경규(78) 경북대 첨단생물산업기계공학과 명예교수는 대한미식축구 80년사를 집필 중이다. 그럴 만한 무게를 지녔다. 대한미식축구협회장을 맡은 적 있는 한국 미식축구 2세대. 대구경북 미식축구 산파였고, 오랫동안 경북대 미식축구팀 지휘봉을 잡았다.
박 교수가 쓰고 있는 책의 가(假)제목은 '꿈을 향한 끝없는 여정'. 2004년 역사를 정리 중이니 대략 70~80% 정도 썼다. 혼자 하기엔 힘이 부친다. 그래도 오랜 시간 꼼꼼히 자료를 모아온 덕분에 혼자서도 가능한 일. 책 제목처럼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 박 교수를 만나 미식축구와 엮어온 길에 대해 들었다.
-오랜 시간 경북대 미식축구팀 감독을 맡으셨다. 수고가 많으셨다. 시원섭섭하실 것 같다.
▶1983년 창단 때 감독을 맡아 계속 팀을 지휘했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40년 넘게 이 일을 한 셈이다. 너무 오래했다. 몸을 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니 힘에 부치기도 한다(웃음).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니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것도 같다.
2월말 감독 자리를 물려줬다. 후임은 이민우 감독이다. 경북대 04학번 공대 응용화학과 출신이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를 참 잘했던 친구다. 대구경북 최고 쿼터백이었다. 사회인팀에서도 뛰면서 미식축구를 놓지 않았다. 일 때문에 바쁠텐데도 선뜻 감독직을 맡겠다고 해줘 고맙다.
-미국에선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선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는 게 미식축구다. 청춘을 미식축구에 바치신 데다 그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셨다. 미식축구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고교 시절 미식축구를 처음 접했다. 당시엔 TV 채널이 3개뿐이었다. 주한미군방송(AFKN)을 통해 미식축구를 본 게 첫 만남이다. 우람한 친구들이 강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부딪히는 게 정말 멋있어 보였다. '저거구나' 싶었다.
서울대(농대 농업기계학과)에 들어가니 미식축구팀이 있었다. 얼른 가입했다. 낯선 스포츠일텐데도 지원자가 참 많았다. 마침 미식축구팀 본거지는 관악산이 아니라 농대가 있는 수원에 있었다. 농대에서 힘 좀 쓴다 하면 다들 미식축구를 했다. 그 덕분에 선·후배 사이도 더 각별해졌다.
-대학 시절 이후에도 미식축구를 놓지 못하셨다. 어떻게 인연을 이어오셨나.
▶대학 3학년 때 카투사(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력)로 입대했다. 근무지가 서울 용산이었다. 미군은 대구, 의정부 등에 주둔한 병력들을 더해 5개 팀으로 리그를 운영 중이었다. 용산팀 매니저를 맡았다. 선수로 뛰기엔 내가 너무 작았다. 당시 몸무게가 70㎏ 정도로 한국인치곤 큰 편이었으나 100㎏를 넘는 친구들에겐 어림 없었다.
경북대 강사 시절 미국 유학을 떠나서도 미식축구를 접했다. 1978~1982년 미국 캔자스 주립대에서 미식축구팀 선수들과 잘 어울렸다. 공부를 도와주면서 배웠다. 박사 과정을 밟은 뒤 경북대로 돌아와 미식축구팀을 만들고 감독직을 맡았다. 청춘을 미식축구로 다 보낸 셈이다(웃음).
-수원에서 자랐고, 서울대를 다니셨다. 대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신 건가. 그리고 가족들은 미식축구하는 가장을 반기지 않았을 듯하다.
▶1976년 처음 경북대에 왔다. 전임강사 자리가 났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엔 시간강사로 시작했다. 목요일 밤 열차를 타고 내려온 뒤 동대구역에서부터 걸어 학교로 들어갔다. 금, 토요일 강의를 진행했다. 잠은 여관에서 잤다. 젊었기에 가능했다. 내 남은 생을 보낼 곳이라 생각하니 힘들다기보다는 기분이 참 좋았다.
'풋볼 위도(widow)'란 말이 있다. '미식축구 과부'란 뜻이다. 아내는 내가 미식축구에 빠져 있는 걸 감수하고 결혼했다. 그래도 고생 많이 했다. 고맙다(웃음). 2남 1녀 중 큰 아들도 해군사관학교 시절 미식축구를 했다. 아이들 모두 여기서 키웠다. 부모님 묘소도 청도에 있다. 50여 년을 대구에서 보냈다. 이 정도면 대구가 진짜 내 고향 아닌가.
-1983년 경북대 미식축구팀을 창단하고 감독을 맡으셨다. 지금도 미식축구가 인기 스포츠라고 하기는 힘든데 그 당시엔 팀을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이 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창단 후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지원자가 많이 왔다. 하지만 쓸 만한 장비가 없었다. 미군들이 쓰던 게 있는지 서울 이태원으로도 장비를 구하러 갔다. 서울대 시절 부산 출신 후배 둘이 고향으로 가 대학 팀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부산으로 승용차 '포니2'를 끌고 가 장비를 얻어왔다.
장비는 연구실에 가져다 뒀다. 한데 당직 근무를 서던 수위 아저씨가 한밤 중에 전화를 걸어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급히 연구실에 가보니 학생들이 밤에 몰래 연구실로 들어가 유니폼을 입고 헬멧을 써보곤 좋아서 자기들끼리 소란을 피웠더라(웃음).
-대구경북과 한국 미식축구를 위해 애를 많이 쓰셨다. 그간 해오신 일을 간단히 들려주신다면.
▶1966년 서울대에서 미식축구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함께해왔다. 대구에선 1980년 영남대 학생들이 모여 미식축구팀을 가장 먼저 만들었고, 이후 각 대학이 창단했다. 대구경북미식축구협회와 대한미식축구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국제미식축구연맹(IFAF) 수석 부회장과 아시아연맹 회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역대 경북대 성적은 407전 261승 8무 138패다. 1998년에는 전국 대학 챔피언과 왕중왕전인 김치볼 챔피언 자리를 모두 차지하기도 했다. 김치볼은 대학리그 우승팀과 사회인리그 우승팀이 겨루는 승부다. 1994~2004년에는 경북대 OB팀인 레드스타스 감독도 겸한 적이 있다.
-현재 대한미식축구 80년사를 쓰고 계신 걸로 안다. 쉽지 않은 일을 맡으셨다. 책을 다 쓴 뒤 계획한 일이 있는지.
▶혼자 자료를 조사하기가 힘들긴 하다. 그래도 꾸준히 다이어리를 써온 게 다행이다. 도움이 된다.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안심할 순 없다. 사람 앞일은 장담 못한다. 나도 어느날 갑자기 눈을 감을 수 있다. 사명감으로 하는 일인데 행여나 중단될까 살짝 걱정이 된다.
책을 다 쓴 뒤엔 전시 공간을 하나 만들고 싶다. '명예의 전당'이든 '박물관'이든 만들어 그동안 모아둔 자료들을 다들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각 대학 유니폼과 50~60년은 된 헬멧, 각종 기록와 영상 자료 등이 많다. 다만 비용 부담이 적지 않다. 여러 곳에서 뜻을 모아주면 더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