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계절의 마디를 구별하기 어렵다. 겨울의 잔상이 봄과 겹쳐 초봄의 시기를 알아채기 어렵고, 때 이른 더위에 소매를 걷어 올리다 보면 늦봄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금세 와 있다.
그렇지만 봄은 춘정(春情)으로 식별 가능한 계절이다. 예로부터 봄은 결혼의 계절이기도 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산능력도 왕성해질 뿐만 아니라 화창한 봄볕과 화사한 봄꽃 향기가 선사하는 설렘 탓도 있으리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자연의 질서 속에 인간도 편입되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1949년 작품인 '만춘 (晩春)'은 혼기가 찬 딸을 시집보내려는 늙은 홀아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은 혼자 남겨질 아버지가 걱정되어 결혼을 극구 거부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곁에서 나이만 들어갈 딸이 걱정되어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제를 두고서 실랑이를 벌이던 와중에, 아버지는 '나도 재혼을 한다'는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자신에 대한 딸의 배려를 포기시키고, 우여곡절 끝에 딸을 시집보낸다.
이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행여나 착한 딸을 잡아두려는 욕심이 생길까 싶어 아버지는 결혼을 서둘러 성공시킨다. 그리고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돌아온 집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고 난 뒤, 낯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겨우 사과 한 알을 깎는 일.
여기서 카메라 렌즈는 쓸쓸히 남겨진 남자의 표정을 차마 담을 수가 없다. 슬픔을 정념의 도구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 '오즈' 감독의 카메라가 고집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쉽사리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사과를 깎는 아버지의 손을 지그시 향한다.
그런 탓에 관객은 사과를 깎는 노인이 손을 보면서, 슬픔에 쉽사리 동조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보단, 가눌 수 없는 그의 슬픔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다. 흘러내리는 눈물 대신에, 끝내 뱉어내지 못하고서 삼켜내는 울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과를 깎는 평범한 행위 하나에 삶의 애환을 담아내는 거장의 솜씨다.
언젠가 영화를 좋아하는 미국인 친구와 일본 영화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던 중에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 "일본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마음이 무너지는 슬픔을 가진 캐릭터가, 그 비통함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보통의 영화들 같으면,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과장된 감정까지도 표현하기 마련인데, 일본 영화에선 결코 그런 식으로 드러내지 않거든.
그런데 말이지, 그렇게 슬픔을 묵묵히 참아내는 모습이 더 감동적이었어. 그 마음의 울림이 전해지더란 말이지." 이 친구, 분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 것이 틀림이 없다. 자칫 수면제가 될 수도 있는 작품을 말이다.
펑펑 우는 장면을 보고서 슬픔을 해소하고 난 뒤, 영화가 끝나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는 감정은 영화적 경험이라 할 수 없다. 슬픔을 묵묵하게 견디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꽃이 피는 기쁨이 있다면 꽃이 지는 슬픔도 있다는 이치를 겸허히 받아들이듯, 슬픔의 무게를 함께 지닐 수 있어야 영화적 경험을 입는 것이다.
신파적인 영화에서 느껴지는 감상적(感傷的) 카타르시스의 큰 진폭보다는,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린 영화적 경험의 여운이 더욱 나를 흔드는 법이다. 그렇기에 '오즈'의 영화는 위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