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겨울 끝자락에 봄을 알리는 고결한 전령 영춘화(迎春花)

입력 2026-03-08 1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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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무학산 자락에 있는 영춘화 군락에 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산책로 주변에 약 가로 3m 세로 8m 넓이의 산중턱에 영춘화가 빼곡하다.
대구 수성구 무학산 자락에 있는 영춘화 군락에 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산책로 주변에 약 가로 3m 세로 8m 넓이의 산중턱에 영춘화가 빼곡하다.

♩사람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늘도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우리 가요 「낙화유수」(落花流水)의 3절 가사다. 예전에 겨우내 얼었던 대지에 추위가 풀려 새 생명이 깃들 무렵 남인수의 목소리로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노래다. 노랫말의 영춘화(迎春花)는 봄을 맞이할 무렵 피는 꽃들을 뭉뚱그린 말이 아니다. 이른 봄에 꽃이 노랗게 피는 나무다. 개나리처럼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물푸레나뭇과의 잎이 지는 관목으로 재스민의 일종이다. 우리가 대표적 봄꽃으로 알고 있는 개나리보다 꽃망울을 먼저 터뜨린다.

영춘화의 줄기는 네모꼴이며 초록색이다. 꽃은 마주나며 꽃부리가 길다.
영춘화의 줄기는 네모꼴이며 초록색이다. 꽃은 마주나며 꽃부리가 길다.

◆원산지 중국, 1천여 년 전 재배

영춘화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1천여 년 전 당나라에서 이미 원예작물로 키웠다.

황금빛 꽃 푸른 꽃받침 봄추위 머금었는데

金英翠萼带春寒·금영취악대춘한

노란 색 꽃 중에 이런 품격 몇 되겠나

黄色花中有幾般·황색화중유기반

그대에 기대어 행인들에게 말하노니

憑君語向遊人道·빙군어향유인도

흔한 순무 꽃(만청화) 보듯 하지 말라고

莫作蔓菁花眼看·막작만경화안간

<『백낙천전시집』(白樂天全詩集)>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영춘화를 완상하며 양랑중에게 드림」[翫迎春花贈楊郎中·완영춘화증양랑중]이다.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는 봄날 영춘화의 황금색 꽃을 보았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봄이라고 말하지만 찬바람이 불어서 꽃이 귀한 '꽃궁기'에 노랗게 피는 꽃이 몇이나 될까. 영춘화를 대신하여 시인은 말한다, 흔한 순무 꽃 보듯이 하지 말라고. 영춘화의 아름다움을 시로 가장 먼저 읊은 선각자답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된 백과사전식 식물도감 『광군방보』(廣羣芳譜)에 나오는 영춘화의 별칭은 '금요대'(金腰帶)이다. 황금으로 장식된 허리띠라는 말인데 이른 봄 긴 초록 가지에 노란 색 꽃들이 촘촘하게 박힌 모습을 보면 이런 비유가 딱 맞는다.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백불고택의 흙담 아래 뿌리 내린 영춘화. 개나리보다 꽃이 좀 더 깨끗해 보인다.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백불고택의 흙담 아래 뿌리 내린 영춘화. 개나리보다 꽃이 좀 더 깨끗해 보인다.

◆2~3월 잎보다 꽃이 먼저 활짝

영춘화는 2월말 쯤 길게 늘어지는 녹색 가지에 마주난 꽃눈이 먼저 올망졸망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다. 날씨가 화창해져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의 전령'이라고 부른다.

대구 경북 지역의 고택 정원이나 담장 아래에 자리 잡은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안동 도산서원 담 모퉁이나 대구 동구 옻골마을의 백불고택(百弗古宅)의 담 아래에서 가지를 소복 드리우고 자리를 지킨다. 대구 도심 공원에도 더러 식재돼 있다. 달서구 송현공원 북쪽 골목길 옹벽과 동구 봉무공원의 주차장에서 단산지로 올라가는 길섶에는 초봄에 잘잘한 노란 꽃들이 제 잘 난 듯이 고개를 내밀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영춘화의 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영춘화의 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멀리서 보면 땅으로 늘어진 가지에 노란 꽃이 달린 모습이 개나리와 엇비슷하다. 줄기가 길게 퍼져 덩굴처럼 보이지만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와 자연스럽게 가지가 땅으로 처진 모양새 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확연히 다르다. 어린 가지는 녹색이고 단면의 모양은 네모꼴이다. 개화 시기는 2~3월로 제법 이르다. 꽃의 형태는 대체로 깔때기와 비슷하고 가지 각 마디에 마주보며 달린다. 꽃부리가 길고 꽃잎 끝은 5, 6개로 갈라져 핀다. 잎은 마주 나고 기수1회우상복엽(깃꼴겹잎)이며 작은 잎은 3∼5개로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어 밋밋하다. 반면 개나리는 3월 하순에서 4월에 꽃이 피는데 네 갈래로 갈라진 통꽃이다. 회갈색 줄기의 키가 3m까지 더 높이 자란다.

영춘화의 향기는 거의 없다시피 아주 미약하다. 줄기가 흙에 닿으면 뿌리를 내리는 왕성한 발근력을 이용해 꺾꽂이로 번식한다.

◆조선 선비들이 읊은 영춘화

영춘화가 한반도에 언제부터 뿌리내렸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관상용으로 길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냇가 돌길은 절집을 가리키고

臨溪石路指僧家·임계석로지승가

나막신 굽 이끄니 풀싹 향기 솔솔

屐齒惹香生草芽·극치야향생초아

문득 나타난 기이한 향기에 나그네 눈 놀라니

忽有奇芳驚客眼·홀유기방경객안

한 그루 영춘화 바위에 의지하고 있네

倚巖一樹迎春花·의암일수영춘화

<『운곡행록』(耘谷行錄) 권5>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 알려진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의 「적용암에서 노닐면서」[遊寂用菴·유적용암] 칠언율시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격변기를 살았던 운곡은 벼슬을 사양하고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에서 농사를 지은 은사(隱士)다. 조선 왕조가 벼슬을 주려해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바위에 기대서 홀로 자라는 영춘화의 처연한 모습엔 시인의 처지가 투영된 느낌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인 유희(柳僖, 1773~1837)가 여러 가지 사물의 이름을 모은 어휘집 '물명고'(物名考)에 나오는 영춘화는 '집에서 재배하며 잎이 두텁고 잎의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다. 마디에서 가지가 나오고 잎이 세 장이다. 정월에 서향과 같은 황색 꽃이 피고 씨를 맺지 않는다'는 설명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봄 온 것을 보자마자 일찍 맞으니

纔見春來早已迎·재견춘래조이영

영춘이란 좋은 이름 누가 붙여주었나

迎春誰爲錫嘉名·영춘수위석가명

향기는 매화 같고 꽃술 색은 밀랍 같으니

香如梅蘂色如蠟·향여매예색여랍

납매라고 불러서 바야흐로 정을 표하리라

喚將蠟梅方稱情·환장랍매방칭정 (이하 생략)

<『표암고』(豹菴稿) 권2>

조선 후기 화가이자 문신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한시 「영춘화」다. '매화 같은 향기와 밀랍 같은 색' 등의 비유는 영춘화의 고유한 특징을 후각과 시각으로 느끼도록 표현했다. 첫 수에는 섣달 추위에 꽃이 피는 납매라고 불러 정을 표하겠다고 다짐하며 영춘화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고 생략된 두 번째 수에서는 부귀와 신선을 모두 가진 꽃으로 헌사(獻辭)했다.

대구 달서구 송현공원의 영춘화가 노랗게 피었다. 멀리서 보면 개나리를 연상하지만 영춘화는 개나리보다 키가 작고 꽃부리 끝은 5, 6개로 갈라지며 어린 줄기가 녹색이다,
대구 달서구 송현공원의 영춘화가 노랗게 피었다. 멀리서 보면 개나리를 연상하지만 영춘화는 개나리보다 키가 작고 꽃부리 끝은 5, 6개로 갈라지며 어린 줄기가 녹색이다,

◆ 꽃말은 희망, 새로운 시작

지금이 바로 대지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을 준비하는 시기다. 하루가 다르게 포근해지면서 대지에는 초록빛이 감돌고 강한 햇살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一花引來百花開'(일화인래백화개)란 말은 꽃 한 송이가 온갖 꽃들을 불러 온다는 뜻으로 쌀쌀한 이른 봄 영춘화의 선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희망' '기다림' '새로운 시작'이라는 꽃말과도 걸맞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이불루 화이불치] 절제된 노란 색의 꽃이 계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비록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더라도 봄의 무대는 이미 막이 올랐다는 메시지다.

난간을 덮은 가냘프고 푸른 가지 길고

覆闌纖弱綠條長·복란섬약록조장

눈에 싸여 추위 이기며 연노랑 꽃 피웠네

帶雪衝寒坼嫩黃·대설충한탁눈황

오는 봄 마중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迎得春來非自足·영득춘래비자족

온갖 꽃들이 함께 향기를 나누리라

百花千卉共芬芳·백화천훼공분방

<『안양집』(安陽集)>

중국 송나라 때 세 황제를 보필한 명재상 압구정(狎鷗亭) 한기(韓琦, 1008~1075)의 「중서동청십영기일:영춘화」[中書東廳十詠其一:迎春]다. 눈 속에서 꽃 핀 강인함을 예찬했다. 추위를 뚫고 가장 먼저 핀 영춘화는 예쁘기만 한 꽃이 아니라 뒤이어 필 뭇 꽃들을 위해 먼저 고난을 견디는 선구자적 면모를 강조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빛나게 돕는 군자의 덕목도 담겨 있다.

여담으로 한기의 '압구정'이라는 같은 호를 썼던 조선의 재상이 바로 한명회(韓明澮, 1415~1487)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설계하고 피바람을 몰고 다닌 일등공신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유지태가 맡은 역이다. 한기처럼 한명회도 세조, 예종, 성종 세 임금을 모시며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세간의 평가는 완전 딴판이다. 사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를 당한 후 신원(伸冤)됐기에 하는 말이다.

언론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