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전세사기 절망 속…피해자가 피해자의 손을 잡다

입력 2026-03-12 11: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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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일일 현장 상담소'에서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계약서와 등기부 등을 확인하며 대응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2022년 10월, 정태운 씨(35)는 전세사기를 당했다. 일반적인 전세사기와는 다른 '신탁 사기'였다.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살고 있던 집에서는 퇴거해야 했다. 1억 원의 보증금은 한순간에 0원이 됐고, 손에 쥔 채권은 종이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LH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면서 정 씨는 보증금 6천500만 원을 회복했다.

정 씨의 인생으로만 보면 불행은 일단락된 셈이다. 이 사건은 전국 첫 'LH 매입'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한숨 돌릴 법도 했다. 그러나 정 씨는 멈추지 않았다. "내 사건이 해결된 것뿐이지, 전세사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후 정 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는 민간단체인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의 공동위원장이 됐다. 전세사기를 겪은 사람이 다시 전세사기 피해자 곁에 선 것이다.

◆ 피해자가 돕는 피해자

6일 오전 만난 정태운 씨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중 한 메시지를 보여주며 정 씨는 미소를 지었다. 카카오톡 대화창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구에서 '1일 상담소'를 운영할 때 만난 분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신청을 네 번이나 했다가 모두 불인정됐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길에도 다섯 번째 신청을 하고 온 상태였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인정'은 사실상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국가가 해당 주택을 매입하거나, 매입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 무상 거주가 가능하다. 또 채권 매입을 통해 전세대출 상환 부담을 줄이고, 최대 20년간 무이자로 원금만 분할 상환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하지만 인정 절차는 쉽지 않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거나 형사 고소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는 등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단순히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정만으로는 사기로 인정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수차례 신청 끝에 불인정을 통보받는다.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역할을 한다. 피해자의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중개대상물 확인서 등 관련 서류를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며 법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낸다. 계약 당시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었는지, 고의로 사실을 숨긴 정황은 없는지 등을 함께 따져보는 것이다.

정 씨는 이를 두고 "피해자들이 놓친 단서를 함께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피해자 역시 '꼼꼼'의 상담 과정에서 등기부와 계약 서류 속 허점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형사 고소가 진행됐다. 결국 그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 공동위원장이 전세사기 피해 대응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 피해자에서 활동가로

그렇다면 왜 민간단체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전세사기를 당한 뒤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경찰이다. 그러나 계약서상 명확한 사기 정황이나 임대인의 기망 의도가 입증되지 않으면 사건은 대부분 불송치나 불기소로 끝난다. 변호사를 찾아가면 형사소송은 어렵고 민사로 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오지만, 수임료 부담도 만만치 않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피해지원센터 역시 행정 절차 안내에 집중돼 있어 피해자들이 체감하는 도움은 제한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러 번 문을 두드리다 결국 좌절하는 피해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정 씨는 그 좌절의 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직접 목격했다. "2024년 5월 대구에서도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다. 전국에서 여덟 번째였다. 대책위에서 함께 활동하던 분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이 확고해졌다. '전문성이 필요하겠다. 아무것도 모르면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날 이후 정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정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세사기 대응 활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피해를 입은 건물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린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시민단체들과 함께 대구 전세사기 대책위를 구성했고, 피해자 250여 명이 참여하는 카카오톡 상담방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전국 대책위 활동에도 합류하면서 제도 개선 논의에도 참여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 제정 과정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하지만 정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상담을 이어가다 보니 법과 부동산 구조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책을 붙잡았고 그렇게 5개월 만에 시험에 합격했다. 정 씨는 "전세사기를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법과 제도를 공부하게 됐다"며 "피해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니 '이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25년 12월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이 발족했다.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 공동위원장이 전세사기 피해 대응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 상담 끝나면 사흘은 몸살

세입자 안전네트워크 '꼼꼼'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구미에서 정기 상담소를 연다. 피해자들이 예약을 통해 찾아오면 상담사들이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등을 함께 살펴보며 대응 방법을 안내한다.

특정 지역에서 집단 피해가 확인될 경우에는 '일일 상담소'를 운영한다. 피해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설명을 듣고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찾아가는 방식이다. 첫 상담소는 오피스텔 전세사기 피해가 컸던 대구 중구에서 열렸고, 두 번째 상담소는 다가구 주택 100여 채에서 피해가 발생한 구미 진평동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 씨는 상담 방식도 피해자 상황에 맞춰 조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 상당수가 생계 때문에 평일 낮 시간을 내기 어렵다 보니 두 번째 상담소부터는 주말 운영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인력이다. 전문 상담원은 정 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고, 보조 상담사 두 명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상담은 대부분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당 한 시간씩 시간을 나눠 최대 40명까지 상담을 진행한다. 피해자의 계약 내용과 보증금 규모, 근저당 상황이 모두 달라 상담 과정에서는 빠르게 계산하고 판단해야 할 내용도 많다. 정 씨는 "상담이 끝나면 진이 빠진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머리가 아플 정도"라며 "하루 상담을 마치면 이틀, 사흘은 몸져눕는다"고 말했다.

◆ 모두 함께 걸으니 가능한 일

그럼에도 그들이 상담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도움이 됐다'고 말해주면 버틸 힘이 생긴다." 정 씨는 이 활동이 여러 사람의 힘이 모였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꼼꼼'의 중심은 전세사기 피해 당사자들이지만, 여기에 법률·노동·의료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힘을 보태고 있다. 변호사들은 형사 고소와 민사 소송 등 복잡한 법적 절차를 돕고, 노무사들은 피해로 생계가 위태로워진 이들의 경제적 회복 방안을 함께 고민한다. 정신적 충격이 큰 피해자들을 위해 의료진이 심리 상담과 트라우마 치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정 씨는 "전세사기 사건의 경우 변호사 수임료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함께하는 변호사들은 최소 비용으로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며 "이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여 피해자들에게 닿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상담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토대로 같은 임대인이나 중개사에게 피해를 입은 사례가 확인되면, 개별 대응보다 공동 고소를 권하기도 한다. 여러 피해자가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사건의 실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 씨는 "그럴 때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정 씨는 "처음에는 도움을 받으러 왔다가 나중에는 다른 피해자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며 "그분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고 전문 상담 인력으로 키워가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작년 12월 세입자 안전을 위한 시민연대 조직인 세입자안전네트워크
전국적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작년 12월 세입자 안전을 위한 시민연대 조직인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이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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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스 -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

집을 보러 가면 보통 햇빛이 잘 드는지, 물이 잘 나오는지, 벌레는 없는지부터 확인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있다. 다음은 정태운 세입자안전네트워크 '꼼꼼' 공동위원장이 강조한 전세사기 예방 체크리스트다.

▶ 등기부등본 먼저 확인하기
집을 보러 가기 전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근저당 설정 여부와 채권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세보증보험 가입 가능 여부 확인하기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주택인지 확인하면 위험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 공인중개사 등록 여부 확인하기
계약 전 공인중개사 자격과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중개사무소 정보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 임대인의 재산 상황 살펴보기
임대인이 보유한 주택 수와 채무 상황에 따라 보증금 반환 위험이 커질 수 있다.

▶ 피해가 의심되면 혼자 고민하지 않기
전세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정 씨는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은 매우 치밀하게 접근한다"며 "피해를 인지했다면 혼자 버티기보다 가능한 한 빨리 상담을 통해 대응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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