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 격동 80년]이승만 대통령 영구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입력 2026-02-26 12: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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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 셈법으로 부결된 안건을 취소 후 가결
"중임만 가능" 조항, 초대 대통령에 한해 예외
욕심은 결국 화 불러, 하야 & 망명 5년 후 죽음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민주당 의원 이철승이 단상에 뛰어올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고 있다.
사사오입 개헌안이 통과되자 민주당 의원 이철승이 단상에 뛰어올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고 있다.

발췌개헌 이후 치러진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국회권력까지 장악하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내친김에 대통령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하지만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은 중임까지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을 바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 라는 이상한 문구를 넣어 1954년 헌법을 다시한번 개정을 시도하게 된다.

1954년 11월 30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에 실린 개헌통과 관련기사.
1954년 11월 30일자 대구매일신문 1면에 실린 개헌통과 관련기사.

◆3선 연임, 이승만 집권 연장의 꿈 이뤄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헌에 앞서 1954년 5월 20일에 있었던 제3대 총선의 결과가 매우 중요했다. 이 선거에서는 각 정당에서 한 선거구에 한 후보를 공천하는 정당 공천제가 처음으로 실시됐다. 4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입후보자들에게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즉 개헌 지지의 다짐을 받고 자유당 후보로 입후보하도록 한 것이다.

5월 20일 총선에서 자유당은 국회 203석 가운데 114석을 차지했으며, 제1야당은 겨우 15석에 불과했다. 이에 자유당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 무소속 의원들을 회유 또는 협박하는 방식으로 136명을 확보했다. 그리고 9월 6일 136명 의원들의 찬성 서명으로 개헌안은 국회의 공식 절차를 밟게 됐다.

정부는 이 개헌안을 이틀 후 공고했으며, 11월 1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공고 기간 동안에는 야당인 민국당과 무소속 동지회는 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펼쳤다. 개헌안 표결은 우여곡절 끝에 11월 27일 비밀투표에 붙여졌고, 재석 202인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이날 국회 사회자였던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1표차로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개헌을 위해서는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 이상, 즉 135.333… 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136표 이상이어야 하는데, 135.333… 명에서 0.5 미만의 끝다리를 떼고 135표 이상이면 가결이라는 논리를 궤변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여권 인사들은 '저명한 수학자까지 동원해 203의 3분의 2를 물었고, 원하는 답(135명)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8일 정부와 자유당은 수학 용어인 '사사오입(四捨五入)'을 근거로 개헌안 통과를 주장했고, 29일 최순주 국회부의장이 개헌안 부결은 '계산상 착오'로 취소한 후 가결 통과를 선포했다. 이때 이철승 의원이 의장석에 등단하여 최순주를 멱살을 잡아끌면서 "내려와"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야당 의원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개헌안 '부결 번복 가결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온 국민의 눈을 가리는 기가 막히는 셈법이 동원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 改憲)이다. 자유당은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해,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켰다. 이 사사오입 개헌은 자유당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개헌안이 표결에서 1표차로 부결되자 자유당은 4사5입의 억지 계산론을 들고 나와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1954.11.29)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개헌안이 표결에서 1표차로 부결되자 자유당은 4사5입의 억지 계산론을 들고 나와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1954.11.29)

◆대통령 하야 후 망명 "욕심이 화 불러"

사사오입 개헌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초대 대통령(1948~52년, 간선제)에 이어 2대(1952~56년, 직선제), 3대(1956~60년, 직선제)까지 국가 수반의 자리를 차지한 것. 국무총리제는 폐지되었으며,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것도 명시했다. 개헌안 중 경제 체제의 중점을 국유·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사영의 원칙으로 이전한 것은 국민을 위한 진일보(進一步)한 내용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 무리한 개헌안 통과에 이은 3선 연임은 또다른 비극을 낳는 씨앗이 됐다. 당시 개헌안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 야당 의원들은 범야당 연합전선을 형성했으며, 11월 30일 '호헌동지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했다. 또,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4년 더 대통령직을 유지했지만, 한국 정치사에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교훈을 선명하게 새겼다. 헌법에 명시된 '1차에 한해 중임 가능' 조항을 초대 대통령만은 예외로 한다는 헌법 개정 시도 자체가 비극의 단초가 됐다. 3선 대통령이 된 후에 4선 도전도 무투표로 당선됐다.

국민은 이 대통령을 용서하지 않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 민주혁명이 발발했으며, 이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했다. 경무대(현 청와대)를 떠나 자택인 이화장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5년이 더 흐른 1965년 7월 19일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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