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25분, 신문사 때려부순 20명의 청년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도는 본래 학업에 전념하여 지식과 덕성을 기르는 데 그 목적이 있음에도, 그러하지 아니하고 외부의 필요에 따라 그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적지 않다. 최근 대구 시내의 예로서는 현관(顯官)의 출영까지 학생들을 이용하고 도열을 지어 3∼4시간이나 귀중한 공부시간을 허비시켜 가면서 늦여름의 뜨거운 태양 밑에 서게 한 것을 목격했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학도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관련자들은 이 점을 깊이 살펴 조심해야 할 것이다".
1955년 9월 13일. 매일신문의 주필이자 편집부장 최석채는 사설을 게시했다. 더 이상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에 국민들, 특히 중고등학생을 동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 주도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철수가 필요하다는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면서, 동원은 잦아졌다. 이들 위원회는 정전협정의 내용이 준수되는지 감독했는데, 스웨덴과 스위스, 공산주의 진영에서 추천한 체코와 폴란드로 구성돼있었다. 이승만 정부 측은 체코와 폴란드 측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며, 시위를 통해 위원회 철수를 압박했다.
사설이 게시되기 3일 전. 이 반발심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발생한다. 시국 강연을 위해 대구를 방문한 임병직 UN 대사를 위해 또 한 번 학생들이 동원된다. 여당인 자유당과 관변단체인 국민회의 주도로, 학생들은 오전 8시 30분부터 비행기를 기다렸다. 태극기를 든 학생들은 폭염과 싸우며 무려 4시간을 허비했다.
마땅히 기사를 써야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대 측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동원했던 국민회의는 '사설 중 문제된 일부를 취소, 집필자를 처단하고 사과문을 게시하라'고 요구한다. 매일신문 측은 당연하게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회 경상북도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당 감찰부장 홍영섭 등 약 20명의 청년들은 행동을 게시한다. 1955년 9월 14일, 오후 4시 25분쯤 탈취된 시영버스 402호가 신문사 앞에 선다. 버스에서는 곤봉과 해머 등 무시무시한 무기를 쥔 이들이 내렸다.
곧장 신문사로 쳐들어간 이들은 통신 시설과 인쇄 기계를 죄다 박살냈다. 배송을 기다리던 신문들 역시 모두 빼앗겼다. 당시 연판부장이던 우종구는 얼굴을 크게 다치는 등 총 8명의 직원이 부상을 입었다.
정상적인 신문 발행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16일 매일신문은 지면을 통해 상황을 알리고, 2~3일간 임시 타블로이드 판을 발행한다.
막을 기회가 있었으나,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약 1시간 쯤 전인 오후 3시 15분, 매일신문은 피습 사건이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지금의 남부경찰서인 남대구 경찰서에 연락했지만, 경찰 측은 고작 2명의 형사만 파견했다.
사건 이후에도 방해 공작이 이어졌다. "백주 대낮에 일어난 테러가 무슨 테러냐"며 경상북도청 사찰과장이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나선다. 자유당은 테러를 '의거'라 명명하고, 사건 조사단장인 최창섭은 "청년들이 애국심에 불타 벌인 일이니, 훈장을 주어야 하지 처벌해선 안 된다"고 발언했다.
경찰 측은 가해자들의 소재를 알 수 없다며 체포하지 않고, 화살을 최석채에게 돌린다. 간첩 행위를 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 비판에 필요한 동원 시위를 비난한 일은 곧 이적행위라고 뒤집어씌운다. 결국 최석채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도움의 손길 역시 차단됐다. 매일신문을 옹호하면, 이적행위로 간주하겠다는 협박장이 대구 시내에 뿌려지기도 했다. 테러를 자행한 가해자를 옹호하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다행히 오명은 멀지 않은 미래에 모두 벗겨진다. 최석채 주필은 체포 1개월 만에 풀려나고,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다. 주도자들은 벌을 받았다.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자 주도자인 홍영섭과 김민은 체포 영장을 발부받고, 김민은 대구형무소에 투옥된다.
최석채 주필은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가 뽑은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협회 측은 "언론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오랜 언론인 생활동안 모든 형태의 부정에 반대하는 용기를 보여줬다"며 시상 이유를 밝혔다.
단순히 기사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신문사를 습격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이면에는 폭력을 묵인하고 부추긴 정부 권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신문 사설 한 편을 둘러싼 탄압은 당시 언론 자유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저항이 훗날 얼마나 값지게 평가받는지를 보여줬다.
이 사건은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 대신, 당당히 해야할 말을 던지는 것. 시간이 흘러도 그것이 언론의 변치않을 역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