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수다]동태전·꼬치전도 부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다문화 며느리들의 '설 나기'

입력 2026-02-11 14: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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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 음식 꿰찬 손길, 달라지는 명절 풍경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직접 만든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직접 만든 '설 모둠전'을 지역의 홀몸 어르신들에게 나눠주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명절 음식이 지역 사회와 이주민을 잇는 매개가 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민족 대명절 설을 앞둔 10일 오후 대구 시내 한 복지관 조리실. 30여 명의 다문화 며느리들이 후라이팬을 잡고 동태전과 꼬치전 등을 쉼 없이 뒤집고 있었다. 타향에서 맞는 명절이지만, 이주여성들의 손끝에서 설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 전 굽는 소리로 시작된 '설 명절'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 3층 조리실에 들어서자 식용유을 두른 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호박전, 새송이전, 어묵전이 차례로 불 위에 올랐고, 뒤집개를 든 손놀림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전' 부치기에 참여한 이는 베트남·러시아·태국·방글라데시·캄보디아·파키스탄·브라질·일본·중국 등 9개 나라 출신 결혼이민여성과 외국인 주부, 유학생들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이들은 서로의 전 굽는 방법을 살피며 "불이 조금 세다", "기름을 더 둘러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전' 이름조차 낯설었던 음식들이다. 복지관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전 부치기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먼저 나서서 도와주신다"며 "명절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태국 출신 결혼이민여성 파캄푼건(38) 씨가 딸을 안고, 새송이전과 애호박전을 굽고 있다. 결혼 10년 차인 그는
태국 출신 결혼이민여성 파캄푼건(38) 씨가 딸을 안고, 새송이전과 애호박전을 굽고 있다. 결혼 10년 차인 그는 "음식을 장만하다보면 허리를 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지만 가족들과 나눠 먹는 즐거움이 크다"며 환하게 웃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눈 감고도 차례상 차려요"

신당동에 사는 태국 출신 결혼이민여성 파캄푼건(38) 씨는 결혼 10년 차다. 2016년 대구에 시집온 그는 첫 설 명절을 또렷이 기억한다. 시어머니의 말을 놓칠까 긴장한 채 부엌을 오갔고, 음식 이름도, 순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탕국부터 전, 나물, 잡채까지 혼자서도 거뜬히 해낸다. 성주 시댁에서 설을 보낸다는 그는 "예전에는 왜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이렇게 많이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설거지까지 하면 부엌에서 하루를 다 보내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고 나서는 시어머니가 '명절에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해주셨다"며 웃었다.

현재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헤어디자이너를 꿈꾼다. "태국 스타일을 살린 이국적인 미용실을 열고 싶다"며 "한국과 태국을 잇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캄보디아 출신 결혼이민여성 윤비체카(35) 씨가 새송이전을 굽고 있다. 결혼 15년 차인 그는
캄보디아 출신 결혼이민여성 윤비체카(35) 씨가 새송이전을 굽고 있다. 결혼 15년 차인 그는 "이제는 눈 감고도 차례상을 차릴 수 있다"며 웃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설' 여행, 친정 가요

다문화 가정의 명절 풍경은 달라지고 있다. 중구 동인동에 사는 중국 출신 우승희(45) 씨는 올해 설 연휴에 시부모와 친정엄마를 모시고 안동으로 1박2일 가족 여행을 떠난다. 제사는 시댁에서 따로 지내지 않고, 산소에서 간소하게 올린다.

우 씨는 "평소에는 다들 바쁘다 보니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며 "명절만큼은 함께 여행도 가고, 음식을 만들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베트남 출신 응우옌 티 린(35) 씨는 "베트남에서도 음식은 주로 여자들이 하기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린 씨는 "차례 음식은 이제 익숙하지만, 명절이 되면 고향 생각이 더 난다"고 했다. 그는 3년에 한 번 자녀들과 함께 베트남을 찾는다. "아이들이 엄마 나라의 설을 직접 경험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정성껏 부친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정성껏 부친 '모둠전'을 용기에 담아 포장하고 있다. 이날 준비된 전은 홀몸 어르신들에게 전달돼 설 명절의 온기를 나눴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 "한국 며느리보다 낫다"…"제사 횟수 줄여 주세요"

송현동에 사는 러시아 출신 소피아(41) 씨는 설이 다가와도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전은 어떤 순서로 부치고, 나물은 무엇부터 무치면 되는지 '차례상 동선'이 몸에 배었다. 스무 해 넘게 명절을 치르며 얻은 요령이다. 가족들은 "이제는 웬만한 한국 며느리보다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말이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처음에는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져 명절이 무서웠다"며 "왜 이렇게까지 준비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함께 떡국 먹고, 어른들께 세배하고, 복을 비는 날'이라는 의미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다.

일본 출신 나츠미(33) 씨 역시 설에 하루 종일 부엌을 오간다. 차례가 끝나도 식사 준비와 설거지, 다과상 차림이 이어진다. 명절의 부담은 여전히 존재한다.

달성군에 사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엘레나(36·가명) 씨는 "시댁 제사가 1년에 8번이었다. 1년 내내 제사 준비를 하다 보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했다. 2년 전 제사를 4번으로 줄인 뒤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여성과 외국인들이 '모둠전'을 용기에 담아 포장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정성껏 부친 전은 홀몸 어르신들에게 전달돼 설 명절의 온기를 나눴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명절의 의미를 가족을 넘어 지역사회로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성서종합사회복지관이 주최한 '이주민의 마음 전하기' 행사는 이주민들이 직접 부친 전을 홀몸 어르신에게 나누는 자리다.

방글라데시 출신 한무스미(26) 씨는 자신이 만든 모둠전을 어르신에게 전하며 "진짜 가족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받았던 도움을 명절에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직접 만든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성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베트남·러시아·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직접 만든 '설 모둠전'을 지역의 홀몸 어르신들에게 나눠주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명절 음식이 지역 사회와 이주민을 잇는 매개가 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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