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32>감히 그 누구도 훼손하지 못했던 종묘

입력 2026-01-28 19:16:20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작가 모름,
작가 모름, '종묘서'(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중), 19세기, 종이에 담채, 40×60㎝,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소장

조선 후기 관료인 하석(霞石) 한필교(1807~1878)는 1839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됐다. 종묘서는 종묘와 왕릉을 맡는 관청이다. 상관인 도제조와 제조는 재상이 겸직하는 자리여서 실제로는 영(令)이 관장했다. 33세의 나이에 종5품으로 승진해 중앙 관서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필교는 이듬해 자신이 근무한 관청을 화가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해서 남기겠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며 장차 완성될 이 화첩의 서문을 자신의 서재 정관헌(靜觀軒)에서 쓴다. 이후 40여 년간 이 프로젝트를 착실히 실행에 옮겨 15점의 관아도가 개인적인 기록화이자 감상화인 독특한 '숙천제아도' 화첩으로 남았다. '거쳤던 여러 관청 그림'은 회화로 기록한 그의 이력서다.

한필교는 서울에 대대로 살며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인 청주 한씨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풍산 홍씨 집안에 장가들었다. 두 집안 모두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이다. 그의 장인 홍석주는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 가까운 인척이고, 홍석주의 동생 홍현주는 정조의 유일한 사위다. 한필교는 25세 때 사은정사에 임명된 장인을 수행하는 자제군관으로 북경을 다녀오며 선진국을 체험했고 기행문도 남겼다.

'숙천제아도' 화첩이 훈련받은 화원의 솜씨인 수준 높은 그림인 점은 그가 쏟은 애정과 아울러 그런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집안 배경도 있었다. 아쉽게도 한필교는 '화공(畵工)'이라고만 했을 뿐 화가를 밝혀놓지 않았다.

이 화첩에 그려진 경관직 관아는 목릉, 제용감, 호조, 종묘서, 사복시, 선혜청, 종친부, 도총부, 공조 등 9곳이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온전하게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 전사청, 재실, 악공청, 망묘루 등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은 종묘가 유일하다. 조선왕조에서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최상위 시설물이어서 감히 누구도 훼손하지 못했다.

지금은 '정전'으로 부르는 건물이 '종묘서'에는 '종묘'로 적혀있다. 건물과 문을 비롯해 부속 시설을 세세히 그렸고 이름을 모두 기록해뒀다. 정전은 가로 100m가 넘는 웅장한 목조 건축이지만 여기서는 전체 공간의 구조와 위치 관계를 한 눈에 보여주는 압축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 했다. 넓은 구역의 많은 건물을 작은 화첩에 모두 넣으면서도 세부 표현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붉은 직선으로 길도 표시했다.

궁궐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는 유학에서 수도를 경영하는 원칙이었다. 종묘는 조상을, 사직단은 땅과 농사를 상징한다. 1995년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건축 공간과 여기에서 펼쳐지는 제사 의례, 제사 음악까지 인류적 보편성을 얻은 장소가 종묘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