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의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국토는 폐허였고, 정부는 부산에 임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총성이 멎지 않던 그해 여름,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쟁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흔들렸다. 대통령 선출 방식을 바꾸는 헌법 개정. 이른바 '발췌개헌'이다.
◆ 신문 1면 장식한 '긴박한 표결'
1952년 7월 5일자 신문은 발췌개헌안 표결이 '금명일(今明日)' 중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전체 의원 203명 가운데 175명의 출석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며, 개헌안 처리를 위해 3일 석방된 야당 의원 10명까지 전원 출석할 것이라는 관측도 함께 실었다. 표결을 하루 이틀 앞둔 국회의 긴박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개헌안은 결국 1952년 7월 4일 밤, 군과 경찰이 국회 의사당을 포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립 표결로 통과됐다. 늦은 밤 이뤄진 가결로 인해 해당 소식은 7월 5일자 지면에는 실리지 못했고, 다음 날인 7월 6일자 신문 1면을 통해 전해졌다. 7월 6일자 신문 하단에는 '호외재록'이라는 표기가 붙어 있는데, 이는 신문·잡지에서 '호외(號外)'로 별도로 발행한 내용을 본문에 다시 수록했음을 알리는 안내다.
7월 6일자 신문의 헤드라인은 '발췌개헌안 遂(수) 통과'였다. 신문은 개헌안 통과로 그간의 정치적 불안이 일단락됐다고 전했다. 표결 결과는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 압도적인 수치였다. 개헌안이 가결됨에 따라 대통령 선거 준비에 착수하며, 선거는 7월 14일 이전에 치러질 것이라는 전망도 함께 실렸다.
◆ 한국 전쟁 한창, 발췌개헌의 배경
발췌개헌이 추진된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가 자리한다.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5·30 총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던 대한국민당이 크게 패배하고,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국회 내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간선제로 재선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대통령 선거 방식을 국민 직선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게 된다. 이것이 발췌개헌의 핵심 동기다.
'발췌개헌'이라는 명칭은 이승만 정부와 야당이 각각 제출한 개헌안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해 하나의 개정안으로 만든 데서 비롯됐다.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야당은 내각책임제와 국회 양원제를 주장했다. 최종안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결합한 형태였다.
◆직선 대통령, 그리고 남은 상처
발췌개헌 이후 치러진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함태영은 부통령에 당선됐다. 국회 간선제로는 어려웠던 권력 연장은 국민 직선제를 통해 가능해졌다.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 기반도 한층 공고해졌다.
하지만 개헌안 통과 과정은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부 야당 의원들을 연행하는 '부산 정치 파동'을 단행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이 탄 통근 버스를 임시 국회의사당인 경남 도청 앞에서 견인차로 끌어 통째로 헌병대로 연행하여 국회의원들을 억류한 것이다.
계엄령과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국회는 자유로운 토론과 표결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결국 야당 의원들이 사실상 압박을 받는 가운데 발췌 개헌안은 기립 표결로 처리됐다.
발췌개헌은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악순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력과 강압으로 헌법을 개정한 전례는 이후 사사오입 개헌과 3선 개헌으로 이어진다. 즉 발췌개헌은 단순한 헌법 개정 사건이 아니였다는 것.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이 어떻게 동원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픈 장면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