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의 미각기행] 갈비 이야기 

입력 2026-01-28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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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대동기계에서 경운기와 트렉터를 생산하기 전만 해도 쇠고기는 소시민에게는
1970년 대동기계에서 경운기와 트렉터를 생산하기 전만 해도 쇠고기는 소시민에게는 '언감생심 고기'였다. 아무튼, 남한 갈비구이의 시작은 1945년 수원 '화춘옥', 대구는 1961년 오픈한 대신동 '진갈비'가 첫 갈비집이다.

나이호', '한강장', '강남장' 등 15개소의 대형 가든형 갈빗집이 들어섰다. 구파발, 일영, 벽제 등 변두리에 가든형 갈비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대구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대신동 '진갈비', 그 다음은 신암동 '신성가든', 고성동 '대창가든' 등이 70년대 구이시대를 선도한다. 80년대 들면서 '대구갈비전성시대'가 전개된다. 서구에선 '한국가든', 이어 남구 앞산네거리 근처에 '앞산가든'과 '가야동산'이 맹위를 떨친다. 중구 반월당 근처에서 출발했던 '제주가든'은 범어네거리 쪽으로 옮겨 기세등등하게 성장한다. 이밖에 한솔가든, 부일갈비, 오륙도, 한일가든, 경북가든, 푸른동산, 늘봄 등이 불판을 뜨겁게 달구다가 사라지고 만다.

갈비와 숯의 앙상블. 그게 맛의 우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갈비와 숯의 앙상블. 그게 맛의 우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88서울올림픽 갈비붐
서울 갈비집에선 갈비를 한쪽으로만 뜨는 '외갈비'를 선호했다. 다이아몬드 칼집도 이때부터 넣기 시작한 것. 반면 강북지역 식당에서는 갈비를 양쪽으로 포 뜨는 '양갈비'를 내밀었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갈비가 득세를 한다. 90년대초 수입 LA갈비가 등장한다. 갈비구이를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갈비도 구역별로 이름이 있다. 제1~5번 갈비는 '본갈비'. 갈비 근육이 살코기와 지방이 세 겹으로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 마블링이 좋아 생갈비구이에 이용해도 무난하나 등급이 낮은 것은 통갈비로 썰어 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제6~8번 갈비는 '꽃갈비'. 양념하지 않고 칼집을 넣은 생갈비구이에 좋다. 제9~13번 갈비는 '참갈비'. 본갈비에 비해 섬유질과 근막이 많고 거친 편이다. 꽃등심과 양지의 중간 정도 맛이 난다. 갈비뼈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갈비탕에 좋다. 서울에서는 흔히 꽃갈비만을 구이용으로 사용하는데 영남지역은 1~13번을 통째로 사용한다.

아무튼 대구의 본격적 갈비붐을 주도한 건 동산동 갈비골목의 터주대감이었던 '진갈비'였다.

갈비는 본갈비·꽃갈비·참갈비로 구성된다.
갈비는 본갈비·꽃갈비·참갈비로 구성된다.

◆진갈비의 추억
대구에서 갈비용 전동톱을 맨 처음 사용한 식당은 어딜까? 중구 대신동 갈비골목의 첫 단추랄 수 있는 진갈비였다. 그전에는 다들 도끼로 절단했었다.

청도군 운문면에서 태어난 진홍렬. 그의 별명은 '진갈비'였다. 그가 등장할 때만 해도 대구에선 소갈비가 무척 낯설었다. 그는 모험을 걸기로 맘먹고 1961년 오픈한다. 5년 뒤 '태동갈비'가 생기고 뒤이어 '성주식당' 등 16개 업소가 밀집하게 된다. 진갈비는 훗날 원갈비, 태동갈비, 성주식당과 함께 동산동 갈비골목 4인방으로 수십년 호시절을 구가했지만 도심재개발 때문에 다 사라지고 지금은 이전한 성주식당 정도만 남았다. 진갈비는 진 사장이 고인이 되었지만 재개발 사업이 끝나면 가족경영이 재개될 모양이다. 그 시절엔 식육점 주인들이 도축할 소를 공동 구매해 서구 원대3가 내환병원 옆에 있었던 도축장(거기에 있던 신흥산업은 63년 성당못 옆에서 삼익뉴타운 근처로, 다시 북구 유통단지로 옮긴다)에서 고기를 가져왔다. 그는 금복주 대신 진로 측과 손을 잡고 진로의 '진'(眞) 자를 넣어 진갈비로 상호를 정한다. 어둠이 깔리면 대신네거리는 온통 갈비가 익으면서 생긴 연기로 뒤덮인다. 그 냄새가 워낙 구수해 경찰들도 은근하게 업소지도를 핑계로 접대를 받곤 했다. 당시 갈비는 1인분으로 팔지 않고 한 대(약 15㎝)씩 팔렸다. 초창기 한 대 가격은 20원이었고 생갈비보다는 양념갈비가 유행했다. 수원갈비는 큼직하게 잘랐지만 그는 5㎝ 정도로 알맞게 잘라 팔았다. 간장과 마늘, 설탕, 배, 참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갈비양념을 만들어 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재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한 끝에 6~10시간이 적당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아낸다. 그 시절 갈비 요리의 최대 제약조건은 저온숙성 문제였다. 지금처럼 고기 전용 냉장고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넣고 고길 저장했다. 여름엔 몇 시간만 방치해도 고기가 변질돼 먹을 수 없었다. 단골들의 상에 그런 고기를 얹을 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에 황소 7마리 반을 팔아치운 적도 있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당국이 숯불가게에서 참나무 숯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한때 화차용 갈탄으로 고기를 굽기도 했다.

갈비의 맛은 굽는 것 이상으로 뼈에 붙은 살점을 어떻게 저미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갈비의 맛은 굽는 것 이상으로 뼈에 붙은 살점을 어떻게 저미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대박 구이집
대구의 소고기 관련 음식도 패턴을 갖고 발전해나간다. 처음에는 육개장, 따로국밥 등이 축이었다. 이어 시장, 섬유공장, 북성로 공구골목 등의 경기가 살아나면서 회식수요가 폭증한다. 이에 부응한 게 불고기와 갈비다. 불고기는 계산동 '땅집', 갈비는 '진갈비'가 대표격. 이 두 음식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 게 '동인동찜갈비'다.

1991년 수성구 만촌동에 가공할만한 숯불구이집이 등장한다. 바로 '비원'이다. 김옥순 사장은 그걸 인척에게 물려주고 1999년 갈비 전문 한정식인 '안압정'을 연다. 이 업소 때문에 그동안 등심 중심이었다가 갈비살 중심으로 변하게 된다. 안압정과 쌍벽을 이룬 갈비집 중 하나가 수성구 '만포장가든'. 사장 박영희는 1981년 대구에서 주물럭등심 붐을 주도한 '한국가든'의 오너였다.

2010년대 대신동 갈비골목 전경
2010년대 대신동 갈비골목 전경

◆대구의 안동갈비
1998년 6월. 대구 갈비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직 흐름하기만 하던 신축 KBS대구총국 골목 중간에 '안동갈비'가 오픈한 것이다. 밀양 출신의 김희곤과 대구 출신의 김정원. 부부는 혹독한 신혼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외국계 회사 영업사원이었던 남편은 너무 착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돈이 만든 절벽 앞에 선 부부는 절규했다. 툭하면 사채업자가 찾아왔다. 아내는 한푼이라도 벌 요량으로 1일 학습지 선생으로 뛰어다녔다. 아내는 이제 도시의 꿈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자고 고집했다. 남편은 결국 트럭을 구입했고 적당한 길목에 세워놓고 종일 과일을 팔았다.

역시 아내의 육감은 남편보다 한 수 위였다. 갑자기 연애시절 안동역에서 먹었던 안동갈비가 생각났다. 60여년 전 안동역전에서 출발한 '서울식당'. 그 식당주는 서울에서 내려온 서원님, 서 씨 할매는 서울 갈비문화에다가 인근 의성의 좋은 마늘을 신의 한 수 식재료로 투입했다. 안동 토박이가 아니라 서울댁이 새로운 버전의 안동갈비를 붐업시키게 된다. 서울갈비 뒤에 거창갈비가 들어와 오래 두 식당이 안동갈비를 전국에 알린다. 현재 운흥동 안동역전은 갈비골목으로 변했다. 무려 15개 업소가 난립해 있다.

아무튼 부부는 안동의 맛을 대구로 갖고 왔다. 채 1주일도 안 돼 별미를 맛보려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쳤다. 그렇게 19년 정도 거기서 보람찬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아내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다. 어느 날 남편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2008년 8월, 아내가 사장이 된다.

안동갈비로는 특허가 나지 않아 유사 갈비집이 난립한다. 나중엔 남구 봉덕동 '봉덕맛길'도 안동갈비 거리로 변한다. 원래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수성구 범어동에 직영점격인 '정원갈비'를 열었다. 그걸 육부장한테 넘기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새롭게 발진했다. 그게 황금네거리 '한국관' 맞은편 이면 골목에 자리한 '혜동식당'이다.

그 흐름을 이어받은 핫플 갈비집은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 내 '참한우숯불갈비집'이다.

이와 함께 대신동 섬유빌딩 옆 '국일생갈비', 범어동 하양농장식육식당, 경산 자인 남산식육식당 등도 꾼들을 많이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