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1948년의 한반도는 더 이상 통일을 논하지 않았다. 대신 남과 북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해,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국가를 탄생시킨 해였다.
◆ 남한만의 선거…분단국가 수립
두 차례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분단국가 수립은 점차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했다. 남한 단독 선거를 승인한 이 결정은 분단을 제도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됐다.
남한 정국은 극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진영은 유엔 결정을 지지하며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반면 남조선노동당 등 좌익 세력은 미·소 양군 철수와 유엔 배제를 주장하며 선거를 거부했다. 김구·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남북지도자회담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좌익과 상당수 중도 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주 4·3사건으로 치안이 불안했던 2개 선거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해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했고, 7월 20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식 선포됐다.
◆북한의 대응과 공화국 수립
북한은 유엔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자, 공화국 수립을 서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3월 9일 열린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25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외국군대 철수를 전제로 전조선적 최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해 민주주의적 인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4월부터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북한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의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 계열 단체들이 이에 호응했고, 남북 정치협상을 주장해 온 김구·김규식 등 우익 및 중도계 민족주의자들도 북행을 결정했다.
다만 남한 민족주의자들은 대표자 연석회의보다는 '남북요인회담'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4월 26일과 30일 김일성·김두봉·김구·김규식 4인이 참여한 이른바 '4김회담'이 열렸고, 별도로 남북 지도자 15인으로 구성된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도 결성됐다.
그러나 남북요인회담과 연석회의는 통일정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북한은 남한 단독선거에 대응하는 동시에 최고인민회의 선거 준비를 병행하며, 남한에서도 지하 조직을 통한 인민대표 선출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남북이 합의한 공동선거라기보다, 조선 전역을 대표하는 정부라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에 가까웠다.
이어 1948년 9월 9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을 내각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수립이 선포됐다. 북한은 자신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하며, 남한의 정부 수립을 '분단을 고착화한 괴뢰 정권'으로 비판했다.
◆ 두 개의 정부, 그리고 경쟁의 시작
1948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과정을 두고 연구자들의 해석은 엇갈린다. 냉전 질서 속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국가 수립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분단이 이미 진행 중이던 정치·군사적 대립이 제도화된 결과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정부 수립 전후로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은 국가 형성과 폭력이 동시에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두 개의 정부가 등장한 순간, 분단은 현실이 되었고 긴장은 일상화됐다. 이 관점에서 1948년은 결단의 순간이라기보다, 통일을 향한 선택지가 급격히 좁아진 시점으로 이해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통성을 주장했다. 남한은 유엔 승인과 선거에 기반한 합법성을 강조했고, 북한은 항일투쟁의 계승과 전조선적 대표성을 내세웠다. 양측은 스스로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하며 상대를 부정했다. 이 과정에서 통일은 공동의 목표라기보다 각 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언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1948년은 분단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정통성을 둘러싼 경쟁과 상호 부정은 이듬해인 1949년, 38선 일대를 중심으로 한 군사적 긴장 고조와 반복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