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대구 아카이브] 경계의 확장과 과밀의 시대… 도시 계획의 시작

입력 2026-01-15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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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조선총독부가 고시한 대구부도시계획총괄도.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구의 인구가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도시 계획을 짰다. 토지이음 제공.
1937년 조선총독부가 고시한 대구부도시계획총괄도.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구의 인구가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도시 계획을 짰다. 토지이음 제공.

[소개] 대구시가 기획, 제작한 책 <지상대구>를 통해 옛 지도와 주요 시설 도면 자료를 통해 대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췄는지 추적한다. ▷교통과 인프라 ▷경제와 산업 현장 ▷문화와 휴식 공간의 조성 등 대구 발전의 궤적을 총 4부로 소개한다. 연재를 여는 1부에서는 도시의 뼈대에 해당하는 행정시설의 변천사와 함께, 확장되는 도시 구역을 다룬다.

1934년 대구 인구는 무럭무럭 늘어나 14만8천명에 육박한다. 당시 인구밀도는 1명당 면적이 81㎡로, 이상적이라 꼽는 1인당 100㎡을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인구를 감당치 못하면서 대구부는 점차 덩치를 불렸다. 대구역으로 가로 막힌 경상감영 북편을 제외하고, 도심은 점점 동과 서, 남으로 확장됐다.

총독부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고자 1937년 3월 23일 대구시가지계획구역, 지역가로, 토지구획정리구역과 면적을 정리했다. 당시 대구부 면적에 약 927만㎡에 주변지역 222개동을 포함시킨 약6천722만㎡이 도시 계획구역으로 꼽혔다. 이 중 거주지역으로 지정한 곳은 4천819만㎡였다.

점점 더 넓어지는 도심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필요해졌다. 1929년 대구 부영버스가 첫 운행을 시작하게 됐다.

수요에 따라 교외선까지 증편되면서, 동촌과 화원까지 총 4개의 노선 버스가 다니게 됐다. 최초 1년 간 적자 운행을 하던 부영버스는 이듬해인 1931년 영업 개선을 통해 흑자를 기록하며 성장한다.

총독부는 대구 지역의 인구가 더욱 늘어날 것을 전제로 도시 계획을 펼쳤다. 1934년 당시 인구는 15만명에 미치지 못했지만, 1965년에는 약 35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 추측했다.

1952년 대구 신천 강변에서 파를 씻는 사람과 목욕을 하는 아이. 한국저작권위원회 2018년공유저작물DB수집.
1952년 대구 신천 강변에서 파를 씻는 사람과 목욕을 하는 아이. 한국저작권위원회 2018년공유저작물DB수집.

그러나 도시 성장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인구 유입이 이어졌다. 결정적 변수는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대 피란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대구는 극심한 인구 과밀 상태에 놓였다. 1953년 대구의 인구는 50만 명으로 늘었고, 이 가운데 18만 명이 피란민이었다.

수많은 피란민이 먹고 잘 만한 곳은 없었다. 이들은 금호강 기슭과 신천 강변에 움막과 판자집을 짓고 생활했다. 전후 재건과 도심 재구축이 필요한 때였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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