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꿈과 품'] 잠은 아이의 미래를 품는 시간

입력 2025-12-04 08: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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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식 제이에스 소아청소년과 원장, 계명의대 명예교수

동산병원 언덕에는 오래된 세 채의 선교사 사택이 지금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료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 건물들은 대구시 문화재이자,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구시티투어의 출발점이자 신혼부부들의 기념사진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곳 계단을 올라가면 '은혜정원'이 있다. 11기의 선교사 묘비가 조용히 세워져 있는데, 그중 한 기에는 대구 최초 장로교 선교사 부인이었던 넬리 딕 애덤스 여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문안예배당 주일학교를 세우고 신명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던 분.

1909년 10월, 불과 마흔셋의 나이로 동방의 낯선 땅에서 생을 마쳤지만 묘비에는 단 한 문장만 남아 있다. "She is not dead but slept."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잠들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성경 속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말씀 "소녀야 일어나라" 처럼 이 말은 단순한 비문이 아니라 '깨어날 것을 기대하는 언약'처럼 들린다. 나라가 흔들리고 희망이 희미하던 1909년의 조선은 어쩌면 깊은 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잠은 끝이 아니라 회복을 준비하는 시간이었고, 결국 우리나라는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나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다. 죽은 듯 보였지만 '깨어날 힘'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영유아 검진을 하면서 이 비문을 자주 떠올린다. 아이들의 수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잠은 멈춤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싶어진다. 아이의 하루는 꽉 차 있다. 보고, 듣고, 움직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끝없이 새로운 정보를 쌓는다. 그런데 이 많은 경험이 진짜 '내 것'이 되는 순간은 바로 잠드는 시간이다. 해마에 저장된 단기 기억이 대뇌의 장기 기억으로 정리되고, 얽혀 있던 신경회로가 다시 가지런히 묶인다. 감정은 잦아들고, 성장호르몬과 멜라토닌이 제 역할을 다하며, 다음 날을 살아갈 힘을 준비한다.

잠이 부족하면 신호는 금방 드러난다. 집중이 흐트러지고, 사소한 일에도 산만해지며, 학령기에는 마치 ADHD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전두엽 기능이 약해져 판단이 흔들리고, 배운 내용을 오래 붙들지 못한다. 감정 기복이 잦아지고 또래와 어울림도 더 어려워진다. 성장도 느려지고, 감기 같은 감염에 쉽게 노출된다. 수면은 아이의 뇌 뿐 아니라 몸, 감정, 사회성을 모두 떠받치는 '숨은 근육'과 같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잠이 부족하면 여유가 줄어들고 말투가 날카로워진다. 평소라면 웃어 넘길 일도 감정이 앞서며 부부 사이에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의 잠이 부족하면 결국 가족 전체가 흔들린다. 반대로 충분한 수면은 집안을 다시 부드럽게 만들고, 부모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잠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가족을 지켜준다.

어릴수록 잠은 발달의 기초가 되고, 초등 시기에는 학습과 사회성의 토대가 된다. 청소년기에는 뒤로 밀리는 생체리듬을 이해하며 충분한 잠을 확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잠이 잘 이루어지는 아이는 잘 배우고, 잘 웃고, 잘 성장한다.

시편 4편 8절에는 "내가 편안하게 누워 잘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라는 글이 있는데, 넬리 애덤스 여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믿음이 이 구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그 선교사들의 마음처럼, 오늘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충분한 잠을 지켜주는 일상이다. 잠은 멈춤이 아니라 깨어남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아이의 미래를 잇는 가장 따뜻한 다리다.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대한민국의 내일을 밝히는 빛이 되기를, 그리고 대구가 다시금 사랑과 희망의 도시로 깨어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