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오의 뿌리내린 영혼 대구경북의 집]구룡포, 기억의 집들이 서 있는 마을

입력 2025-11-09 1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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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공원의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조형물.조형물 뒷편으로 구룡포 항구가 보인다.
구룡포 공원의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조형물.조형물 뒷편으로 구룡포 항구가 보인다.

◆용이 승천한 포구에서

마을은 산자락과 들판에만 터를 잡는 게 아니다. 바다를 품은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들어서기도 한다. 그곳 사람들은 파도처럼 깨어나,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먼 수평선까지 배를 몰았다. 그들이 언제나 만선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아니다.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일, 정녕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이 아닌가.

물 반 고기 반이 섞인 풍요한 어장을 도둑맞은 때가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등장한 이방인들이 이 어장을 훔치더니 주인 행세를 하며 해안에 그들이 머물 집을 세웠다. 낯선 언어와 풍습이 해일처럼 밀려와 조선인 마을을 삼켜버렸다.

패전의 여파로 이방인들이 허겁지겁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자, 남겨진 집들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마침내 빼앗긴 바다를 찾아 주었고, 이방인의 마을을 한국인의 마을로, 그들의 집을 우리의 집으로 돌려놓았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입구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갈색 바탕에 새겨진 흰 글씨가 햇살을 받아 선명히 빛난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입구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갈색 바탕에 새겨진 흰 글씨가 햇살을 받아 선명히 빛난다.

그 기구한 사연이 입혀진 집을 보고 싶었다. 그 집들이 모진 풍파 속에서도 어떻게 지금껏 견뎌왔는지를 알고팠다. 그 집들이 서 있는 곳, 그 마을이 바로 포항 구룡포다. 한 마리는 바다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솟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한반도의 가장 동쪽 끝, 호미반도 구룡포에 서린 상서로운 기운이 이렇게나 장대하다.

가을 햇살이 구룡포항의 풍경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어선들은 만선의 출항을 앞두고 여유롭게 몸을 푼다. 갯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힌다. 어부들은 서로 모여 그물을 털며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한다.

구룡포 앞바다는 어부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아낌없이 선사해 왔다. 특히 영일만 해풍에 말린 과메기는 예로부터 궁중에 진상할 정도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구룡포 바다에는 아픔이 있다. 나라의 기운이 흔들리게 되자 일본 어민들이 구룡포 바다에 출몰했다. 새로운 어장을 찾아온 그들은 제국의 위세를 앞세워 구룡포 바다를 장악했다.

산자락에 집을 짓고 살던 조선인들은 이방인들의 출현이 두렵고 놀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에는 일본식 목조가옥이 줄지어 들어섰고, 바다는 조선인의 바다가 아닌 제국의 바다로 바뀌었다. 해안이 매립되면서 일본인 거리는 더 크게 확장되고 번성했다. 반면에 구룡포 조선인 마을에는 애환이 짙어졌다.

구룡포 공원으로 오르는 이 계단은 일본인들이 신사로 향하던 길이다. 이제 이 길은 구룡포의 모든 곳으로 열려 있다.
구룡포 공원으로 오르는 이 계단은 일본인들이 신사로 향하던 길이다. 이제 이 길은 구룡포의 모든 곳으로 열려 있다.

◆조선인의 삶터로 오르며

구룡포항을 눈에 담은 후, 발걸음을 일본인 가옥 거리 쪽으로 옮긴다. 먼저 '구룡포일본인가옥거리'라 적힌 표지판 앞에 선다. 당장 그 표지판을 따라 거리를 걷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이곳의 뿌리, 한국인들이 터를 잡았던 언덕으로 향한다. 구룡포의 조선인들은 오래전부터 매 바위 봉우리가 있는 응암산(158m)을 등지고 언덕바지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살았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세월이 층층이 쌓인 집들이 나란히 붙어 있다. 붉은 벽돌집과 낡은 슬레이트 지붕, 군데군데 덧칠된 벽면이 뒤섞인 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쪽에는 텅 빈 집터에 잇댄 철골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그것은 마치 사라진 집을 사수하는 파수꾼처럼 보인다.

언덕 벽에는 아이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장식이 설치되어 있다.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마치 아이의 친구 같다.
언덕 벽에는 아이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장식이 설치되어 있다. 언덕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마치 아이의 친구 같다.

언덕의 조선인들은 바다보다 땅을 더 믿었다. 바다에 기대기보다 땅에 더 의지하여 먹고 산 까닭에 바닷가에 집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어업에 능한 이방인들이 나타나면서 마을은 위아래로 나뉜다. 언덕 위에는 조선인 마을이, 바다와 가까운 해안에는 일본인 마을이 자리하게 된다. 이 공간의 분리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위계 그 자체였다.

언덕을 조금 더 오르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루에 닿는다. 지금은 구룡포 공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식민지의 흔적이 선명하다. 구룡포 상권을 장악한 일본인들은 이 언덕마루에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신사를 세웠다. 방파제 공사에 공을 세운 일본인을 기리는 송덕비가 그 곁에 세워지고, 소학교까지 들어서며 언덕마루는 제국의 터전으로 바뀐다.

구룡포 공원 언덕마루에 서면 반짝이는 구룡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넉넉한 바다의 풍경 어딘가에서 용이 승천할 기세다.
구룡포 공원 언덕마루에 서면 반짝이는 구룡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넉넉한 바다의 풍경 어딘가에서 용이 승천할 기세다.

1930년대에 이르러 구룡포는 동해안에서도 손꼽히는 어항으로 성장했다. 항구에는 수백 척의 일본 어선이 정박했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조선인 선원과 노동자들로 붐볐다. 그러나 그 번성은 모두의 몫이 아니었다. 바다에서 얻은 이익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흘러들었고, 조선인에게 돌아온 몫은 언제나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국의 영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패전이 닥치자 일본인들은 허겁지겁 본국으로 돌아갔고, 신사는 철거되었다. 구룡포 청년들은 송덕비 비문에 시멘트를 부어 지워버렸다. 신사를 대신하여 포항 출신 전몰군경을 기리는 충혼탑과 충혼각이 건립됐고, 식민지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일본인 거리에서 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식민의 시간과 해방의 시간이 교차하는 상징의 길이다. '용왕당입구(龍王堂入口)'라 새겨진 석주를 지나면, 하늘로 닿을 듯한 계단이 길게 펼쳐진다. 1944년 일본인들이 신사로 오르기 위해 만든 이 계단은 한 칸 한 칸이 제국의 번영을 기원하던 발자취였다. 계단 양옆에는 당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들이 지워지고 돌려세워져 있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계단을 따라 아이들이 손을 잡고 오르고, 연인들이 웃으며 내려온다. 계단은 더 이상 제국의 신을 향한 길이 아니라, 구룡포의 모든 거리로 통하는 길이 된 것이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언덕과 해안 사이, 하나의 마을 구룡포

구룡포 공원 기슭에 펼쳐진 일본인 가옥 거리로 향한다. 이 거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옛 정취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무 격자창과 흰 회벽이 어우러진 2층 목조가옥들이 골목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낮은 담장 아래에는 작은 화분과 물동이가 놓여 있다.

좁은 골목은 용트림처럼 부드럽게 굽이치며 이어지고, 오래된 간판과 붉은 우체통, 카페와 가게가 뒤섞인 풍경을 걷는 관광객들의 표정이 밝다. 이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마치 한 편의 옛 영화에 출연한 기분에 잠긴다.

거리 한편에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있다. 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2층 목조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큰 재산을 일군 일본인이다. 제국의 어장이 번성하던 시절, 그 집은 조선인이 넘볼 수 없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남겨진 집에는 오랫동안 한국인이 머물렀다. 2010년 포항시가 이 집을 매입해 복원했고, 지금은 '구룡포근대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다.

구룡포 근대문화거리에 복원된 근대역사관.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2층 목조가옥이다.
구룡포 근대문화거리에 복원된 근대역사관.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 출신의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2층 목조가옥이다.

근대역사관으로 바뀐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 안으로 들어선다. 마당에는 석등과 조경수들이 놓여 있고, 1층 다다미방에는 부쓰단(가정용 불단), 고타츠(난방 테이블), 후스마(미닫이문) 등 일본 가옥의 특징이 정갈히 재현되어 있다.

이 집을 바라보는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그 시절, 일본인 선주들의 배에 올라 거센 파도와 맞서야 했던 조선인 어부들의 고단한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이 집이 단순히 '보존된 가옥'이 아니라, 식민지 구룡포인의 삶과 애환을 증언하는 기억의 집으로 오래 남기를 바란다. 아니, 이 집만이 아니다. 이 거리와 골목, 그리고 남겨진 일본인 가옥들이 구룡포의 역사를 기리는 공간으로 호흡하기를 기대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구룡포 사람들은 자신들의 바다로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남겨진 일본식 가옥에 터를 잡았다. 낯선 집이었지만, 그 안에서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며 일상의 불을 지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구룡포 사람의 손길과 발길, 마음이 그 집들을 바꾸어 놓았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나그네를 반기는 구룡포의 어른들을 만나게 된다. 그분들은 오래전의 구룡포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준다. 그 이야기 속에는 바다에 바친 노고의 세월, 그리고 희미하지만 잊히지 않는 식민지의 삶이 겹쳐 있다.

구룡포 마을은 언덕의 조선인 마을과 해안의 일본인 마을로 더는 나뉘지 않는다. 언덕이든, 해안이든 모두 구룡포 마을일 뿐이다. 식민지의 시간과 해방의 시간 모두 구룡포의 역사로 녹아들었다. 바다와 함께 동고동락한 구룡포 사람들의 지난한 역정과 그 애씀이 이 마을을 오늘에 이르게 했다.

나그네는 구룡포 바다를 향해 마지막 시선을 던지고 천천히 떠난다.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