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병 주고 약 주는 옻나무, 화려한 가을 변신

입력 2025-10-19 13: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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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나무 단풍은 누런색, 황적색, 주황색, 선홍색까지 색상이 다양하다.잎은 아까시나무와 같이 긴 잎자루에 새 깃털 형태로 두 장씩 마주나는 우상복엽이다.
옻나무 단풍은 누런색, 황적색, 주황색, 선홍색까지 색상이 다양하다.잎은 아까시나무와 같이 긴 잎자루에 새 깃털 형태로 두 장씩 마주나는 우상복엽이다.

물러나 살기에 그만인 몇 칸 오두막 數間蝸舍足幽棲

울타리 서편 옻나무 가지런히 서 있네 虎落西邊漆樹齊

첫서리 내린 뒤 노을처럼 짙붉을 제 一幅丹霞霜早日

청려장 짚고 나서면 꽃동산 걷는 듯 杖藜疑是步花谿

<『명고전집』 권1 명고팔영(明臯八詠)>

조선 순조 때 문신 서형수(徐瀅修, 1749~1824)가 지은 「옻나무 밭두렁에서 단풍 감상」[漆陌賞葉]이라는 칠언절구다. 그는 자신의 호를 딴 명고정사 앞에 뜨락을 만들고 두둑에는 옻나무 수십 그루를 빽빽이 심었다. 가을에 잎이 물들어 붉은 빛이 집 기둥 밖의 마루까지 비추는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선다.

옻나무 단풍은 누런색, 황적색, 주황색, 선홍색까지 색상이 다양하다. 가을철에 산행을 하다 우상복엽(羽狀複葉·깃꼴겹잎)의 나뭇잎 가운데 색깔이 불타는 듯 선홍색이 눈에 띄면 십중팔구 그 나무는 옻나무 종류이거나 붉나무이다. 특히 가을비에 젖은 옻나무는 물방울이 맺힌 자리에 비색(緋色)의 멋과 매력이 더욱 선명하다. 점잖은 조선 사대부가 꽃동산에 비유할 만큼 강렬한 색감으로 물드는 옻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옻나무 단풍.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옻나무 단풍.

◆옻나무 종류

옻나무는 옻나뭇과의 낙엽교목으로 키가 20m까지 자라는 교목이다. 나뭇가지에 어릴 때는 털이 있으나 자라면서 차츰 없어진다. 잎은 아까시나무와 같이 긴 잎자루에 새 깃털 형태로 두 장씩 마주나는 우상복엽이다. 작은 잎은 계란형 또는 타원형에 끝은 뾰족하며 9~11개에 달한다.

4~5월에 황록색의 꽃이 피지만 자세히 관찰해야 볼 수 있다. 열매는 편평한 원형에 9, 10월경 연한 황색으로 익는다. 가을이 깊어 가면 회색의 작은 열매들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옻나무 종류에는 중국이 고향으로 알려진 옻나무와 일본이 원산이라고 알려진 덩굴옻나무, 우리나라 토종의 개옻나무, 검양옻나무, 산검양옻나무 등이 옻나무속(Toxicodendron)의 한 집안을 이룬다. 옻나무를 '참옻나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개옻나무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옻나무는 대부분 심어 키우기 때문에 민가나 경작지 주변에서 자란다. 반면 개옻나무는 우리나라 전국 야산에 흔하다. 옻나무와 개옻나무 사이를 형제로 여긴다면 우리 산하 어디든지 가장 널리 자생하며 심지어 도심 야산에도 무럭무럭 자라는 붉나무는 옷나무의 사촌뻘이다.

대구 수성구 범어공원의 붉나무 단풍.
대구 수성구 범어공원의 붉나무 단풍.

옷나무과 집안은 같지만 붉나무속(Rhus)이기 때문이다. 단풍이 고운 수입산 관상수 '티피나옻나무'는 옻나무가 아니라 붉나무 속의 식물이다. 업계에서 옻나무로 이름을 붙였지만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이름은 '미국붉나무'다. 검양옻나무는 제주도나 전라남도 지역에서 자라므로 대구 경북에서는 수목원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병, 옻나무

… 향기 난다 향나무/ 복장 터져 복장나무/ 사시사철 사철나무/ 늠름하다 느릅나무/ 가렵다 옻나무…

지방마다 전해지는 나무타령은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옻나무는 하나같이 '가렵다 옻나무'로 독이 피부에 오른 상태를 표현했다. 옻나무는 독성이 강해 피부 알레르기 질환을 일으킨다. 피부가 붉게 되고 좁쌀 같은 발진이 생겨 가렵게 만든다. 발진이 터지면 진물이 나면서 피부를 짓무르게 한다. 옻나무 수액의 우루시올이라는 성분이 원흉이다. 옻에 민감한 사람들이 옻나무를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나무로 여기고 접촉을 피하는 이유다.

이런 위험에도 사람들은 봄철 어린 순을 따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는다. 맛이 일품이라며 해마다 옻 순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여름에는 닭고기와 쟁여두었던 옻나무 가지를 함께 푹 고아서 옻닭이라는 별미로 먹는다. 약간 거무스레한 국물을 입에 넣으면 쌉싸름한 맛이 가득 퍼진다.

대구시 수성구 진밭골 계곡의 밭에 심어진 옻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구시 수성구 진밭골 계곡의 밭에 심어진 옻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옻의 강한 독성을 한약재로 활용했다. 생옻을 불에 볶는 등의 법제(法製)를 거쳐 독성을 줄이기도 한다. 건조 과정을 거친 건칠(乾漆)은 맛이 맵고 약성은 따뜻한 성질을 가지지만 독성은 그대로다.

인류는 옻나무 수액인 옻을 수 천 년 전부터 천연도료로 이용했다. '칠하다'는 말은 옻을 뜻하는 한자 '漆(칠)'에서 유래돼 오늘날 액체나 물감을 바르다는 뜻으로 쓰인다. 옻칠은 목기, 가구 등 생활용품 뿐만 아니라 소소한 미술공예품 등을 오래 보존하거나 표면을 아름답게 처리하기 위해 널리 사용됐다. 방충, 방부, 방습 기능이 뛰어나고 뜨거운 열기, 산(酸)과 알칼리에도 강해 인류가 오래 전부터 사용한 천연도료다.

페인트, 니스 등 화학도료가 판치는 오늘날 칠기는 민속공예로 명맥을 겨우 유지되지만 옛날 옻은 없어서는 안 될 물자였다. 목판인 팔만대장경이 오랜 세월 보존 된 것도 옻칠을 한 경함의 영향이고 삼국시대 불상이나 왕관, 장신구 등과 청동이나 철제에도 옻칠을 했기 때문에 원형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한다.

◆옻나무 언제부터 재배됐나

기원전 7세기 쯤 완성된 중국 『시경』에 옻나무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 재배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세기 삼국시대부터 공예재료로 사용됐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옻칠 위에 조개껍데기 조각으로 예쁘게 장식한 나전칠기가 국가의 공식 외교 답례품과 의례 공예품으로 만들어졌다. 나라에서는 옻칠 생산을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하고 옻나무 생육을 관리했다.

경북 포항시 한 시골집의 뒤란에 심어진 옻나무의 잎사귀가 한두 장씩 물들고 있다.
경북 포항시 한 시골집의 뒤란에 심어진 옻나무의 잎사귀가 한두 장씩 물들고 있다.

재배된 기록을 보면 신라 35대 경덕왕 이전에 이미 칠전(漆典), 즉 식기방(飾器房)이란 관직이 있었다. 고려 선종 5년(1088)에는 옻을 공물로 바치도록 했고, 인종 23년(1145)에는 알맞은 땅에 뽕나무, 밤나무, 닥나무와 더불어 옻나무 재배가 권장됐다.

조선 초기 문신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은 이미 옻나무가 널리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옻나무 심고 오동나무 가꿔 이미 숲을 이루니

種漆栽梧已作林

봄이 깊자 산새들이 오만 가지로 울어대네

春深幽鳥百般鳴

인생은 한가히 사는 흥취만 한 게 없기에

人生無似居閑興

아름다운 산수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노라

勝水佳山次第尋

<『사가시집』 4권>

『조선왕조실록』 세종 14년(1432)에는 335개 고을 중 옻나무 세금을 바치는 고을이 과반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닥나무, 대나무, 뽕나무, 옻나무는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밑천"이라고 할 정도로 경제성 있는 나무로 인정받았다.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의 옻나무 사이로 기와집이 보인다. 옛날 많았던 옻나무는 사라지고 주민이 밭에 심어놓은 크지 않는 옻나무만 몇 그루가 있다.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의 옻나무 사이로 기와집이 보인다. 옛날 많았던 옻나무는 사라지고 주민이 밭에 심어놓은 크지 않는 옻나무만 몇 그루가 있다.

◆대구 옻골에 옻나무가 없다?

대구 동구 둔산동의 경주 최씨 집성촌이 옻골이다. 옛날 옻골에는 남쪽을 제외하고 마을 3면 둘레에 옻나무가 울창했다고 한다. 약 400년 전 옻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칠계(漆溪)'로 불렀다.

옻골 동산은 오직 나의 허름한 집이지만 㓒園惟敝宅

측백나무 언덕은 바로 신선의 집이라 柏岸是仙廬

단지 세 봉우리 가깝게 떨어져 있을 뿐인데 只隔三峰近

문득 만 리도 넘는 거리와 같아졌네 便同萬里餘

어찌하여 자주 보지 못하고 胡爲頻不見

또한 오래도록 편지조차 없는가 還致久無書

병석에 누워 인사를 간략히 하니 病懶簡人事

점점 정이 멀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말게 莫言情漸踈

<『백불암집』 권1>

옻골의 백불암 고택 주인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이 1746년에 지은 「송장(宋丈) 광유(光裕)의 운(韻)을 따서 짓다」[次宋丈 光裕 韻]는 시의 두 번째 연이다. 첫 째 연에는 팔공산 아래에 터를 잡고 전원생활의 풍류를 읊었고 두 번째 연은 친구와 소원해진 안타까운 심정을 담고 있다.

오늘날 옻골에는 옻나무가 거의 없다. 밭에 식용으로 기르는 서너 그루가 고작이다. 그렇게 많던 옻나무가 왜 사라졌을까? 옻나무의 새순은 먹거리로, 가지는 약재나 식재료로, 수액은 칠로 쓰임이 많다보니 사람들이 한 그루 두 그루 씩 야금야금 베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명이 길지 못해 60년이 지나면 고목이 된다.

선홍빛으로 물든 옻나무 분재.
선홍빛으로 물든 옻나무 분재.

근대의 격변기를 지나오면서 '옻골'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옻나무는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게 『장자』의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쓰임이 많아서 베임을 당하는 옻나무의 교훈 '무용지용(無用之用) 역설'의 현타 아닌가.

옻나무의 베임은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시에도 언급된다. 도산서당 부근에 옻나무 밭[漆園]이 있었던 모양이다. 퇴계는 「칠원」(漆園)이라는 제목 아래에 "칠이 세상에 쓰이니 베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혹시 베임을 면하더라도 베임을 당할 도리라(漆有世用 其割焉保 厥或免割 乃割之道)"고 부연하며 '무용지용'의 처세를 높이 평가했다.

"노장의 학설은 난도(亂道) 차원의 허무지설(虛無之說)"이라고 비판하면서 특히 장자에 대해서 "이학(異學)이란 점에서 경계하라"고 하던 선생이 '옻나무의 베임'에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듯하여 덧붙인다.

옛 고을 빈 터만 남아 있지만 古縣但遺基

옻 밭은 관청서 심은 그대로 漆林官所植

베임을 당한다는 깨우치는 말 했으니 見割有警言

장주도 또한 식견이 높구나 蒙莊亦高識

<『퇴계선생문집』 권3 「도산잡영」>

전 언론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