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
뉴스나 다큐 외에는 잘 보지 않지만 머리를 식힐 양으로 별생각 없이 TV를 켤 때가 있다. 이때 리모컨은 만물상을 여는 버튼식 열쇠이다. 손가락을 까딱하면 이런저런 프로가 튀어나오는데 다수를 점하는 건 단연 예능 프로이다.
여럿이 나와 자유로이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그 중 하나인데 처음부터 보지 않아도 이해된다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누가 진행자인지 몰라도 된다. 메인 MC가 주도하는 이른바 '짜고 치는' 형식이 아니라서 좋긴 한데 가끔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때가 있다.
가만 이유를 생각해 보니 바로 그것이다. 출연진 중 누군가가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설 때를 모른다는 것. 단순히 튀는 행위로 눙칠 수만은 없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보았던 남녀 교제 프로도 마찬가지다. 한 출연자가 칼자루를 쥔 채 시종여일 감정을 과도하게 쥐어짜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하다 못해 민망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 편집을 하겠지만 한계가 있을 터. 그처럼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다는 게 생뚱함을 넘어 자기도취의 행태가 될 경우 부끄러움은 오롯이 시청자들의 몫이다.
하긴 그게 어디 TV예능 프로에 국한된 것이겠는가. 모임 분위기를 그르치는 건 누군가의 독주 때문일 경우가 많다. 연장자라서, 직급이 높아서, 연봉이 많아서, 성적이 높아서, 하다못해 월등히 잘생기고 예뻐서 내딛는 그의 걸음이 거침없을수록,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발자국이 찍힐수록 반대편에선 뒷걸음질치기 마련이다.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사회 분란(紛亂)의 요인은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저와 다르지 않다. 진퇴의 시기가 그만큼 중요하다.
내가 거처하는 집은 골목 맨 안쪽에 있다. 수십 년 된 낡은 연립주택들이 도열해 있는 골목은 풀과 야생화들이 암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항시 보도블록 틈새를 엿보고 있다. 뽑고 자르고 짓이겨도 분연히 머리를 내미는 그들의 저항에 주민들은 마침내 타협안을 내놓았다. 사람들이 행보하는 곳의 것들은 제거하되 담장에 붙어 있는 것들은 살려 주는 것으로.
담장에 붙어 연명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짠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잡초로 냉대 받는 바랭이나 쇠뜨기는 물론 민들레, 씀바귀, 뽀리뱅이, 괭이밥, 분꽃 들은 산야에 뿌리내렸다면 맘껏 자유를 누렸을 생명들이다.
"한 걸음 앞이 천길 낭떠러지". 어쩌다 적정선 밖으로 뛰쳐나간 동료를 잃은 꽃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그럴 때면 자발없이 나섰던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니 독단이란 갑옷으로 무장한 채 짓쳐 나가는, 물러서는 건 죽음이라고 스스로를 고무하는 이들에게 우리 골목의 풀과 꽃들에게 한 말씀 들을 것을 제안한다. 그들의 말씀인즉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서는 거라고. 발을 걸고 싶은 일방통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