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토론의 근본은 '경청'
국민에게 정치 불신과 피로감 안겨
집단적 폭력으로 번질 가능성 높아져
"대한민국 국회가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대화와 토론의 근본은 경청(傾聽, 敬聽)이다. 경청은 선입견과 판단을 유보하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발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이며, 이는 곧 상대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자세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경청이 결여되면 토론은 상호이해의 과정이 아니라 대결구도로 전락하고, 각자의 주장만 고집하는 장이 된다.
야유(揶揄)는 상대의 발언이나 행동을 빈정거림으로 맞서는 행위다. 이는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집단적 압박을 노리는 표현방식으로, 자유로운 발언권을 위축시키고 대화를 봉쇄하며 조롱과 모욕의 성격을 띤다. 특히 야유는 고성(高聲)과 결합되기 쉬워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집단적 폭력으로 번질 위험이 크다.
고성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상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경우다. 전자는 일정 부분 순기능이지만, 후자는 감정을 격화시키고 분노를 과시하는 역기능으로 작동한다.
현대사회에서 '야유 섞인 고성'은 운동 경기장과 국회에서 두드러진다. 경기장에서 그것은 관중의 스트레스 해소와 집단 응집력 강화를 돕고, 반칙이나 불공정 판정, 비신사적 플레이에 대한 제재기능도 수행한다. 과도하면 스포츠문화를 적대와 소모의 장으로 변형시킬 수 있으나, 본질이 유희와 경쟁인 만큼 일정수준의 야유와 고성은 오히려 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
반면 정치현장의 '야유 섞인 고성'은 괴성(怪聲)으로 변질되어 민주적 토론을 파괴하고, 공론장을 소음과 폭력의 무대로 전락시킨다. 이는 국민에게 정치불신과 피로감을 안길 뿐 아니라, 미래세대에게 인간사회가 조롱과 고성의 각축장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준다.
경청과 소통이 무너진 국회의 야유와 고성, 이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타락상이다. 민주적 토론장은 이미 저급한 아수라장으로 추락했다. 참으로 수치스럽고 참담한 광경이며, 이제 국민의 냉철한 심판만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