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17>18세기 화원화가 이성린의 '사로승구도' 중 부산 풍경

입력 2025-09-24 15: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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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이성린(1718~1777),
이성린(1718~1777),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중 '부산', 1748년(영조24), 종이에 담채, 35.2×70.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시대 화원화가 이성린이 삼백여 년 전 부산포의 부산진성(釜山鎭城)과 포구를 그린 진경산수화다. 바다 쪽 멀리서 비껴 내려다본 시점이라 성으로 둘러싸인 진(鎭)과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의 부산시 동구 범일동으로 화면 중심부의 증산(甑山)은 부산진성공원으로 조성됐고, 도시화로 성곽이 대부분 없어진 데다 포구는 매립돼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부산포는 우리나라 동남 해안을 방어하는 수군의 진(鎭)이 설치된 군사 요충지였고, 한편으로는 일본 교역을 중개했던 대마도의 배가 들어오는 무역항이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하는 외교사절단인 통신사(通信使)가 떠나는 곳도 여기였다. 조선 후기 국방과 무역, 대일 외교의 최전선이었던 이곳을 이성린이 '부산'으로 그린 것은 1748년 봄 통신사행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봄꽃이 화사한 풍경이다.

화원화가의 임무 중 하나가 왕을 대리해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단의 공적 업무와 외국의 풍물을 이미지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이성린은 한양→ 충주→ 문경→ 영천→ 부산에서 목적지 도쿄(당시의 에도)까지 행차 길을 30폭의 '사로승구도'로 그렸고 '부산'은 그 첫째 폭이다.

다음 폭은 대마도로 이어진다. '사로(槎路)'는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이고, '승구(勝區)'는 명승지이므로 바다 건너 이국의 풍경을 그린 감상물임이 나타나는 제목이다. 지금은 상하 2권의 긴 두루마리로 장황돼있다. 처음 경험하는 낯선 지형과 풍물을 소화한 당시 31세 이성린의 실력을 잘 보여준다.

'부산(釜山)'으로 써넣은 것은 함께 수행한 글씨 담당 공무원인 사자관(寫字官)의 솜씨다. 왕복 10개월에 걸쳐 500여 명의 인원이 통신사행을 마친 후 보고 자료로 올리기 위해 미리 계획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영조를 비롯해 조정 대신들은 이 그림들을 국정을 기록한 시각물이자 회화 감상물로서 직접 열람했을 것이다. 영조의 지시가 있어서 이렇게 대규모로 그려졌다고 추정된다.

소재(蘇齋)로 호를 썼던 이성린은 친가와 외가의 윗대가 사자관, 화원을 지낸 미술 전문직 집안 출신이고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가 모두 유명 화원인 그림 명문가다. 이성린이 남긴 감상화는 이때의 사행에서 일본인에게 그려준 송죽(松竹), 묵매, 산수, 도석인물 등 일본에 전하는 몇 점뿐이다. 이후 29년을 더 살았던 이성린이 한양에서는 기량을 펼칠 수 없었을까? 보존되지 못했을까? 작품이 전하지 않아 아쉽다.

조선시대 통신사행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차례 있었지만 그 여정을 담은 우리의 옛 그림은 '사로승구도'가 유일하다. 18세기 화원화가 소재 이성린의 대표작 '사로승구도'는 조선인 화가가 남긴 당시의 일본 풍경이라는 의의도 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