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5월 29일 경산군 하양면(현 경산시 하양읍) 무학산(600m) 중턱 무학농장. 오늘은 해발 350m 산허리 오른쪽을 개간하는 날. 구수하게 익어가는 보리밭 위 산비탈에 인부들이 줄지어 섰습니다. 장정들은 곡괭이로 아낙네들은 호미로, 풀밭을 후려치고 흙덩이를 부숩니다.
"산지를 개척해 실업자를 구하고, 농축(農畜) 교습장을 마련해 농민을 돕는 것이 나의 이상…." 그 꿈을 이루겠다며 발 벗고 나선 이는 이임춘 하양성당 주임신부. 실은 4년 전부터 시작했지만 돈도, 일손도 턱없이 모자라 겨우 평평한 땅 1천여 평(3,305㎡)만 끄적이고는 답보 상태. 꿈이 사그라들 무렵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수산나 메리 영거(한국명 양 수산나). 머나먼 영국에서 가난한 한국을 돕겠다며 1959년 꽃다운 나이(23세)로 대구에 온 그였습니다. 효성여대(현 대구 가톨릭대)에서 영어교수로, 삼덕동 가톨릭여자기술학원 원장으로 여성들과 동고동락하던 이 무렵, 수산나는 이 신부의 안타까운 사정에 팔을 걷었습니다.
도움을 얻으려 밤낮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어렵사리 영국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에서 농장조성자금을 보내왔습니다. 웨일즈의 가톨릭구호단체, 가톨릭국제개발조직에서도 돕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진심에 박경원 경북도지사도 나섰습니다. 수산나가 동참하면서 농장 일은 일사천리로 풀렸습니다.
3월 12일 개간을 위한 첫 괭이를 내리친 지 2개월여 만인 이날, 8월 말로 예정된 1차 개간지 8만평 중 거의 절반을 끝냈습니다. 인부는 경산군 추천 60명, 교우 50명, 이 신부가 직접 선정한 주민 40명 등 150명으로 모두 실업자들. 품값으로 돈 대신 원조 밀가루를 후하게 쳐주며 강행군 끝에 황무지 산허리가 바둑판처럼 반듯한 농장으로 변했습니다.
먼저 개간한 1만 7천평에는 벌써 옥수수·감자·고구마가 초록빛으로, 조만간 나머지 개간지 1만 5천여 평에도 모종을 낼 예정입니다. 9월부터 시작될 2차 공사, 하양 국도에서 이곳까지 4km 농로와 저수지 공사에는 박 지사가 군 장비를 지원키로 했습니다.
농장 한 복판에 지은 건물은 스코틀랜드 풍의 유럽식 3층 짜리 우사(牛舍). 스코틀랜드는 수산나가 태어난 곳으로, 고국의 기술지원이 쉬웠을 터. 맨 위층은 산비탈에서 구름다리로 곧장 연결된 건초 저장소. 건초는 건물 안에 들인 사일로에서 사료와 배합돼 1·2층 우사로 내려보내 일손을 덜도록 했습니다. 등겨, 쌀겨 등 영양이 좋은 사료를 쉽게 얻으려 농장에는 정미소까지 들였습니다.
개간 2년만인 1965년, 마침내 농장이 재 모습을 갖췄습니다. 23여 만평(760,330㎡)의 광활한 초지 위에 우사·돈사·숙소·창고에다 농장 아래엔 우유가공소도 뒀습니다. 돈사는 운동시설(베란다)도 갖춰 '돼지 호텔'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생산한 '헴프셔' 새끼 돼지는 농가에서 분양 신청이 줄을 이었습니다. (매일신문 1965년 5월 31일 자, 가톨릭신문 1964년 4월 19일, 1968년 7월 28일 자)
안타깝게도 무학농장은 1969년 말을 끝으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주 원인은 경영난. 설상가상으로 이임춘 신부가 1965년 말 설립, 운영하던 무학중학교가 자금난에 빠지자 농장을 포기하고 학교를 살리기로 했던 것. 결국 농장은 매각되고, 그 자금은 무학중·고교가 명문으로 성장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새마을 운동에 앞선 농촌 근대화 현장. 파란 눈의 수산나가 먼 이국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했던 무학농장. 그 울림이 크다고 2019년 경산 시민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등록문화재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빛내보자 했지만 건물은 여전히 덩굴에 뒤덮혀 있습니다. 60년 세월을 힘겹게 버티고 섰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