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중국 영향력 강해지면 한국의 운명은?

입력 2025-09-01 09:23:03

조선 초기 제작된 세계지도인
조선 초기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 지구의 거의 대부분을 중국이 차지하고, 두 번째 큰 나라로 조선을 표기한 이 지도는 중국은 중화, 조선은 소중화라는 당대 지식인들의 생각을 상징한다.
중국의 칙사를 맞기 위해 세운 영은문. 그 옆에는 모화관을 세워, 조선 국왕은 이곳까지 거동하여 중국 칙사에게 수치스런 사대의 예를 표했다.
중국의 칙사를 맞기 위해 세운 영은문. 그 옆에는 모화관을 세워, 조선 국왕은 이곳까지 거동하여 중국 칙사에게 수치스런 사대의 예를 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가 조선에 용모 단정한 처녀들을 요구했고, 조선에서는 최고의 미인들을 뽑아 중국에 보낸 내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나라가 조선에 용모 단정한 처녀들을 요구했고, 조선에서는 최고의 미인들을 뽑아 중국에 보낸 내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청주 한씨 족보. 청주 한씨 중앙종친회 사이트에는
청주 한씨 족보. 청주 한씨 중앙종친회 사이트에는 '가문을 빛낸 인물'이라는 코너에서 중국으로 끌려간 한영정의 두 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은 개국 이래 왕조의 생존을 위해 중국에 사대(事大)의 외교 시스템을 수용했다. 사대란 큰 나라(즉 중국)가 작은 나라(조선)의 군주를 왕으로 세우고(이를 책봉이라 한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휘하에 들어가거나(이를 입조라 한다) 조공을 바쳐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사대 질서가 미치는 지역을 '천하'라 불렀으며, 그 밖의 지역은 이적(夷狄)의 세계로 간주했다. 중국 황제는 주변국 왕들에게 작위를 주어 국왕이나 제후로 임명하여 군신(君臣)의 종속 관계를 맺었다.

사대란 강력한 국력을 보유한 대국의 주변에 위치한 나라가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외교술로써, 그 자체로는 비판받을 것이 없다. 하지만 지배층이 국가안보를 큰 나라에 의존하여 존립을 유지할 경우 주체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큰 나라에 의지하여 살다 보면 자연히 그 나라에 정신적으로 예속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문제다. 사대주의로 500년을 일관했던 조선에선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을까?

◆중국에 바쳐진 5명의 조선 처녀

태종 8년(1408) 4월 16일 중국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조선 국왕에게 말하여 미녀 몇 명을 골라 데리고 오라"는 칙서를 낭독했다. 태종은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라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같은 해 7월 2일 중국 사신 황엄(黃儼)은 경복궁에서 직접 처녀를 선발했다. 중국 사신은 "처녀들이 한결같이 박색"이라고 분노하며 담당 관리를 포박하고는 "어째서 아리따운 처녀가 없느냐. 네가 감히 다른 뜻을 가지고 형편없는 여자들만 뽑아 올린 것 아니냐"하며 다그쳤다.

이날 태종실록은 행여 이역만리 중국 땅에 끌려갈까 무서워 갖가지 꾀를 쓰는 조선 처녀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다리가 병든 것같이 절룩거리니 황엄이 매우 노했다. 사헌부에서 딸을 잘못 가르친 죄로 조견은 개령에, 이운로는 음죽에 귀양 보내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중국 사신이 처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분노하자 이후인 7월 3일, 의정부에서 각도에 순찰사를 파견하여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는 모두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시켜 중국 사신의 사열을 기다려라.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지 않거나, 침을 찌르거나, 머리를 자르고 약을 붙이는 등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는 자는 '임금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죄'로 처단하거나 가산을 적몰한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전국에서 난리법석을 벌인 끝에 같은 해 11월 12일, 중국 사신 황엄은 조선 처녀 5명을 선발하여 떠났다. 끌려간 처녀는 공조 전서 권집중의 딸(18세), 인녕부 좌사윤 임첨년의 딸(17세), 공안부 판관 이문명의 딸(17세), 충좌 시위사 중령호군 여귀진의 딸(16세),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14세)이었고, 수행원 28명이 동행했다.

이들이 중국으로 끌려갈 때 생이별하는 부모와 친척들의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길창군 권근은 비운의 처녀들을 위해 '구중궁궐에서 요조숙녀를 생각하여/ 만리 밖에서 미인을 뽑는다/ 부모를 하직하니 말이 끝나기 어렵고/ 눈물을 참자니 씻으면 도로 떨어진다/ 슬프고 섭섭하게 서로 떠나는 곳에/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르도다'라는 시를 지어 바쳤다고 태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틈만 나면 처녀 요구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 처녀들은 나라 전체를 뒤지다시피 하여 찾아낸 만큼 미모가 출중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태종 9년(1409) 5월 3일, 중국 사신이 와서 "지난해 보낸 처녀들은 한결같이 박색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은 칙서를 낭독했다.

"지난해 너희가 바친 여자는 살찐 것은 살찌고, 마른 것은 마르고,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가 좋지 못했다. 다만 너희 국왕의 공경하는 마음을 생각해 비(妃)와 미인(美人), 소용(昭容)에 봉하기를 마쳤다. 왕이 뽑아 둔 여자가 있거든 한두 명을 다시 데리고 오라."

비와 미인, 소용은 후궁에게 내리는 관명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처녀 다섯 명은 명나라 황실로 보내져 황제의 후궁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중국은 기회만 나면 처녀를 요구해 왔다. 세종 8년(1426) 4월 10일에는 차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 노비를 요구하여 20명을 뽑아 보냈다.

중종 16년(1521) 4월 29일에는 "어린 화자(火者, 환관 후보자)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와 어린 계집을 선발하되, 성질이 부드러워 부리기 쉬운 사람으로 수십 명씩을 뽑아 보내라"라는 요구가 전해졌다. 궁중에서는 어전회의를 열어 사대부 집안 처녀 대신 천민 여자를 뽑아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6월 2일 중종은 중국으로 보낼 처녀 선발과 관련하여 "여자 뽑는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느냐. … 9세부터 12세까지 각 도 감사가 친히 가려 뽑아서 사신들로 하여금 시빗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혹시라도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 자살하는 폐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 보내라. 뽑힌 자가 정밀하지 못하면 담당 관원과 감사를 힐책하겠다"라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 내용은 처녀 선발 과정에서 비극적이며 끔찍한 일이 자행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절 중국 황실의 처녀 요구에 못지않게 골치 아픈 일은 중국 사신들이 잠자리에서 여성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태종 3년(1403) 8월 19일 실록에는 "중국 사신 마인(馬麟)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처음에 중국 사신이 오면 기생이 시침(侍寢)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유사길이 받아들이지 않은 뒤로부터 이를 폐지했다. 이때 마인이 자진하여 받아들인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 16년(1434) 10월 27일 실록에도 중국 사신에게 기생을 바친 사례가 발견된다.

'(중국의) 세 사신이 기생을 관계하려 하여 도감에서 여자를 바쳤다. 이튿날 사신들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사흘에 한 번씩 문안하시오" 했는데, 그 이유는 일찍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다.'

인조 15년(1637) 11월 18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각 고을을 지날 때마다 기생을 요구하자 "기생들이 죽음으로 항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무리 천한 기생이라도 오랑캐 사신에게 정조를 더럽힐 수 없다는 뜻이었을까?

◆명나라 황제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殉葬) 당해

이 시절 중국으로 끌려간 여인 중에는 운이 좋아 중국 상류사회로 진출한 사례도 더러 있었다. 태종 17년 5월 9일 '중국에 보낼 처녀 두 명을 뽑았는데, 황 씨와 한 씨를 상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 씨는 한영정의 딸로서 품위 있고 아름다운 용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여인이 명나라로 끌려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세종 6년 10월 17일 실록에는 한 씨가 대행황제(大行皇帝, 명나라 태종)가 죽었을 때 순장(殉葬) 당한 기록이 보인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됐다. 한 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아 나는 간다"고 했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어 죽었다. 여러 궁인들이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 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라고 했다.'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죽음에 이어 세종 9년 5월 1일 실록에는 한영정의 막내딸이 또다시 중국으로 끌려간 사연이 등장한다. 한영정은 두 딸을 모두 중국으로 떠나보낸 비운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처녀 한 씨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 따라 죽었다. 이때 막내딸 얼굴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중국에서) 뽑아가게 되었다. 한 씨가 병이 나서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고 하오" 하고 칼로 침구를 찢고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주었다. 침구는 시집갈 때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막내딸이 중국으로 끌려가 또다시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으니 그 정황은 성종 10년 7월 4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확(韓確)의 누이가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선종 황제(宣帝, 명나라 4대 황제)의 후궁이 되고 성황 황제(成帝, 명나라 5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환관 정동(鄭同)과 결탁하여 자주 정동을 본국(조선)에 파견하여 옷과 노리개, 음식 등을 바치게 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혹독하게 거둬들여 큰 병폐가 됐다. 또 칙령으로 한 씨의 일가친척을 해마다 성절사(중국 황제 생일에 파견하는 사신)로 입조하게 하므로 한치례와 한치인, 한치의(이들은 모두 한확의 아들임), 사촌인 한치형, 한충인, 조카인 한한, 한찬 한건이 번갈아 중국 조정에 드나들었다. 한 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얻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청주 한씨 중앙종친회 사이트에는 '가문을 빛낸 인물'이라는 코너에서 중국으로 끌려간 한영정의 두 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사례가 가문을 빛낸 행위였는지는 몰라도, 조선이라는 나라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수치스러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미·중 신냉전의 와중에 중국의 거친 패권적 행보가 한국을 향하고 있다. 미·중 사이에 낀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되는 순간이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