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임재환] 재난 이후에도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입력 2025-08-31 14:39:12 수정 2025-08-31 17:32:41

사회부 기자

임재환 사회부 기자
임재환 사회부 기자

"시간이 몇 년이나 지나다 보니 그냥 살아가는 거죠."

지난 한 달간 태풍과 산사태, 지진, 산불 등 재난을 겪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줄곧 들었던 말이다. 어르신들은 "우린 이제 괜찮은데 젊은 양반이 고생이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구에서 먼 길을 달려온 만큼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손주 이야기 같은 일상부터 풀어내며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두세 시간씩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어르신들의 너스레는 차츰 깊은 속내로 바뀌었다. 덮어 두었던 상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고 말끝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말은 살아 내는 법을 스스로 달래는 자조였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재난도 사람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그 양상은 제각각이었지만, 지워지지 않는 재난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굳어져 삶 전체를 옥죄고 있었다.

3년 전 포항 힌남노 태풍으로 지하 주차장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매일 그곳을 찾아 눈물로 기도한다. 순식간에 덮친 산사태에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은 지금도 숲길을 지날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있다. 나뭇가지에 걸린 물건 하나에도 아내의 흔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한 줌의 가능성을 붙잡고 싶어서다.

지진을 겪은 노인은 더 이상 손주들을 보금자리로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다. 집에서 밥을 해 먹이며 누렸던 소소한 행복을 이제는 기억으로만 꺼낸다. 산불로 인한 불씨가 화살처럼 집을 폭격하는 모습을 본 어르신은 하늘에 '소방 헬기'만 뜨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장기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체계는 잘 가동되지 않는다. 포항시처럼 트라우마센터가 지어진 곳을 제외하고는 피해자 대부분이 홀로 그날의 아픔을 삭이고 있다. 기자가 취재한 21명 가운데 심리 지원을 받아 본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이마저도 재난 당시 1회에 그친 경우가 적잖았다.

재난 대응 선진 국가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재난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미국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피해자 코호트(동일 집단)를 구성해 매년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관련 질환에 대한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23년 9월 기준 현장 응급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 등 8만6천481명과 생존자 4만945명이 등록돼 있다. 재난이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아픔이라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를 기점으로 재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안전망이 두터워졌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상흔을 어루만져 주기보다 복구에 중점을 두는 모습이었다. 지난해에도 신현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자의 지속적인 치료 체계와 재난 트라우마 주치의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재난의 상흔은 '복구'라는 행정 용어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무너진 집은 다시 세울 수 있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재난의 기억 속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재난 대책은 복구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긴 호흡으로 피해자들의 삶을 붙들어 줄 장치가 필요하다. 지역사회와 제도가 함께하는 촘촘하고 지속적인 돌봄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후 변화로 자연 재난의 위력이 거세지는 오늘날, 재난은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사전 예방을 위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을 마련하는 일도 절실하다. 그것이 재난을 겪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자, 또 다른 재난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