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백악관에 들어서는 각국 정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있다. 'Z 모멘트'다. 금년 2월 28일, 트럼프-젤렌스키 정상회담 때 두 사람이 벌인 설전을 뜻한다. 밴스 미 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외교적 해결을 제시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신이 말하는 외교가 무슨 뜻이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러시아와의 굴욕적 휴전 협상을 거부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러시아를 달래면 전쟁이 당신에게도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당신에게는 지금 카드가 없다"며 공개적인 모욕을 줬다.
2023년 젤렌스키는 미 의회 연설에서 "미국의 돈은 자선이 아니라 국제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자"라고 역설해 큰 갈채를 받았다. 바이든 정부는 그를 소련의 불법 침략에 맞서 싸우는 자유의 전사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겨우 2년 뒤, 트럼프 정부는 그를 무례하고 배은망덕하며 호전적인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이게 Z 모멘트다. 쉽게 말해, 힘없는 자는 입도 없다는 뜻이다. 밴스는 "그냥 감사하다고 말하라"며 젤렌스키를 윽박질렀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품위와 여유, 관대함은 어디로 갔나. 하지만 이 모든 문제가 트럼프 개인의 스타일 때문 만은 아니다. 2차대전 후 만들어진 '규범에 기초한 국제 질서'가 종언을 고하며, 세계질서가 근본적 변혁기를 맞고 있다. 자유무역질서와 안전보장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트럼프 시대에 그게 분명해졌다.
2차대전을 반성한 미국은 전후 두 개의 체제를 세웠다. 하나는 자유무역을 지키는 브레튼우즈 체제다.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는 그 초석이었다. 다른 하나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유엔이다. 유엔 헌장 2조는 침략전쟁을 금지한다. 위반 시는 유엔 헌장 7조에 의해 군사적 응징도 가한다. 6·25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두 체제는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보호해 온 궁극적 안전판이었다. 지난 80여 년간 세계대전 없이 인류가 번영을 구가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미국은 위대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미국이 앞장서 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목표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다. 더 솔직하게는 '미국만 다시 위대하게'라는 21세기형 고립주의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얼마 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WTO가 지배하는 현재의 이름 없는 세계질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 대체물이 이른바 '트럼프 라운드', '턴베리 시스템'이다. 하지만 트럼프발 관세폭탄을 보면, 세계무역은 더 이상 자유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트럼프는 한국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고 말했다. 약탈에 가깝다. 그 문제로 한미정상회담이 무산될 뻔했다.
침략전쟁도 고삐가 풀렸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게 돈바스를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평화의 대가다. 국제규범이 아닌 힘이 곧 정의다. 뉴욕타임스는 "제국주의 시대 방식으로 21세기의 문제를 논의한 회담"이라고 혹평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미국이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1938년 뮌헨회담 때 영국, 프랑스는 나치에게 체코를 팔았다. 체임벌린 영국 수상은 그걸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불렀다. 1945년 얄타회담 때는 미국, 소련, 영국이 독일과 한국을 분단시키고, 동유럽을 소련에게 넘겼다. 21세기에 바로 그런 시대가 부활했다.
한국은 전후 미국이 만든 질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나라다. 한미동맹과 미국 시장이 없이는 오늘의 한국도 없다. 그게 사라지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트럼프의 미국에게 동맹은 없다. 북한핵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기 위해 뉴욕을 불태우지도 않을 것도 분명하다.
한국은 강대국의 쉬운 먹잇감이었던 20세기의 뼈저린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그 냉엄한 현실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결론은 동족보다 동맹이고, 동맹보다 자강이다. 동맹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자강없이는 동맹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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