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독수공방...HIV 감염된 80대 시골 할머니, 어쩌다?

입력 2025-08-08 19:44:03 수정 2025-08-08 20:07:49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전경.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홈페이지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전경.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홈페이지

2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농촌 지역에 거주하던 80대 여성이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AIDS·에이즈)의 원인 병원체인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사실을 확인한 사례가 보고됐다. 의료진은 문맹, 사회적 고립, 낮은 임상적 의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진단이 수년간 지연된 것으로 추정했지만, 결국 감염 경로는 밝혀내지 못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감염내과와 혈액내과 연구팀은 지난달 28일 국제학술지 '임상 사례 보고'(Clinical case reports) 8월호에 지난해 림프종에 따른 항암제 치료를 위해 시행한 혈액검사에서 HIV 양성으로 최종 진단된 환자 사례를 소개했다. 이번 사례의 주인공은 85세 여성 A씨로, 그는 지난해 4월 내시경 검사로 림프종 진단을 받고 1차 항암화학요법을 시작하기 전 기초 검사에서 HIV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당시 CD4 림프구 수치는 ㎣당 83세포, 혈중 바이러스 수치는 7만650복사본/㎖로 이미 심각한 면역저하 상태였다.

A씨는 20여 년 전 남편이 사망했으며 이후 성생활을 포함해 수혈·주사 약물 사용·침술·문신 시술 등의 이력은 없다고 밝혔다. 남편의 생전 HIV 감염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가족들은 "심장질환으로 입원해 여러 검사를 받았다"며 가능성을 낮게 봤다. A씨의 두 자녀 역시 모두 HIV 음성 판정을 받았다. 결국 A씨의 감염 경로는 규명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진단 당시 낮은 CD4 수치와 높은 바이러스량으로 미뤄 감염 시점은 수년 전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환자는 문맹이었고, 시골에서 홀로 지내며 두 아들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의료진과의 면담에서 HIV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답했으며, 장기간 사회적 고립과 낮은 건강 정보 이해 능력이 병력 청취의 정확성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A씨가 2018년 배에 불편함을 느껴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부터 간 수치 상승, 위궤양 발견 등으로 정기적인 검사와 치료를 받아왔지만 HIV 검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검사는 림프종 항암치료 전 표준 선별검사의 일환으로만 진행됐다. 연구팀은 이를 두고 "위험 요인이 명확하지 않은 노인에 대한 낮은 임상 의심이 진단 지연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이번 사례가 드문 80대 신규 HIV 진단 사례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국내 HIV 보고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신규 감염자의 1.8%가 70세 이상이지만, 세부 연령별 통계가 없어 80대 이상의 발병률은 확인이 어렵다. 이로 인해 고령층 감염이 실제보다 저평가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령층 HIV 환자는 성생활이나 감염 위험 행동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과 낙인 때문에 의료진이 검사를 제안하지 않거나 환자 스스로 노출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팀은 "현재 13~64세를 대상으로 권고되는 HIV 선별검사 지침이 사회·경제적 취약성이 높은 고령층의 조기 진단 기회를 놓칠 수 있다"며 "임상적 취약성과 면역학적 이상이 있는 노인 환자에 대해서도 검사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또 문맹이나 정보 접근성이 낮은 환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의사소통 전략과 사전적 검진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연구팀은 "이번 사례는 건강 정보 이해도가 낮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고령층이 어떻게 의료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며 "의료진 교육과 국가 차원의 검진 지침 개선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