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욱의 대구문화 오디세이]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축소판, 대구

입력 2025-08-03 13:14:13 수정 2025-08-03 19:25:02

예술인들 뜨거운 창작열 전란 아픔 속 꽃피운 희망
박목월·서정주·유치환·마해송 등 피난길 오른 예술인들 대구에 집결
지역 예술인과 어우러져 창작 활동…대구, 한국 문화예술 중심으로 우뚝
백조다방·녹향 등 예술인 아지트로…예술 교육기관 '상고예술학원' 설립
출판사 출범·문학지 발행도 잇따라

1951년 향촌동의 르네상스 골목 북쪽 끝 모나미다방에서 열린 한솔 이효상의 출판기념회.jpg
1951년 향촌동의 르네상스 골목 북쪽 끝 모나미다방에서 열린 한솔 이효상의 출판기념회.jpg

6·25전쟁기 대구지역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담당하는 큰 축이었다. 미래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토대를 다졌던 문화예술의 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피난 예술인의 요람

대구에 온 피난민들 속에는 박두진·박목월·서정주·유치환·마해송 등 문화예술인도 많았다. 대구와 전시(戰時) 한국예술의 인연은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어진다. 고난과 시름을 안겨준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도 대구의 구도심 지역 즉,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는 예술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시인 구상과 조지훈, 화가 이중섭 등과 같은 예술계 인사들이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전선(戰線) 문화의 꽃을 피웠다. 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한 다방과 대폿집 등에서 출신과 계층 등에 얽매이지 않고 많은 작품을 창조하면서 삶의 애환과 예술에 대한 창작열을 달래었다.

당시 다방은 예술인들의 작품발표회가 열리는 등 문화공간 역할을 하였다. 꽃자리다방에서는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본심 후보에 오른 구상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유래된 청포도 다방과 매우 귀한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한 백조다방 등은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1951년 모나미다방에서 열린 이효상
1951년 모나미다방에서 열린 이효상 '바다' 출판기념회

그리고 최초의 클래식 감상실로 평가받는 '녹향'이 있다. 1946년 광복 이듬해에 문을 연 녹향은 시인 양명문이 가곡 「명태」를 작사하고,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황소」 그림을 그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녹향은 많은 이들에게 예술의 창작과 향유를 제공하던 역사적 문화명소이다.

고전음악감상실
고전음악감상실 '녹향'

당시 대구의 한 음악다방을 찾은 외신기자들이 전쟁의 초토 위에서 클래식 음악이 들린다고 타전하기도 했다. 그 음악다방에 관한 이야기는 미국의 음악잡지 『에튀드(Etude)』가 1953년 10월호에 '코리아 콘체르트(Korea Concerto)'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였다. 이 음악다방은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르네상스'이다. 이처럼 대구는 수많은 예술인을 품어 창작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대한민국 예술사를 상징하는 스토리와 흔적이 남아있는 요람과도 같았다.

상고예술학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상고예술학원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한국 최초 예술전문 교육기관 '상고예술학원(尙古藝術學院)'

6·25전쟁기에 상고예술학원(尙古藝術學院)이 있었다. 상고예술학원은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난 예술인들과 지역 예술인들이 뜻을 합쳐 결성한 한국 최초의 예술전문 교육기관이다. '상고(尙古)'라는 명칭은 대구의 대표 시인인 이상화의 호인 '상화(尙火)'의 상(尙)과 이장희의 호(號)인 '고월(古月)'의 '고(古)'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 대구에 설립되었던 상고예술학원은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예술 전문 교육기관이었다. 초대 원장은 마해송이 맡았고, 조지훈, 최정희, 구상, 박훈산, 박영준, 박기준, 장덕조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이 직접 교육을 담당한 것이다. 이처럼 피난 예술인과 지역 예술인들이 합심하여 6개월 과정의 문학, 음악, 미술과를 개설함으로써 전란 중에 꽃 핀 문화예술의 배움터가 되었다.

상고예술학원 동문집
상고예술학원 동문집

상고예술학원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90여 명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설가 김동리, 장덕조, 최정희, 정비석, 박종화, 김기진, 최상덕, 최인욱, 김영수, 박영준 등이 있고, 시인 유치환, 구상, 조지훈, 이은상, 오상순, 박목월, 박두진, 양명문, 김달진 등도 참여했다. 국문학자 양주동, 아동문학가 마해송, 극작가 유치진, 음악가 김동진과 김성태, 연극인 이해랑, 수필가 전숙희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이 함께했다.

대구의 문화예술인 가운데는 시인 백기만, 이효상, 이윤수, 이호우, 이설주 등과 소설가 김동사, 화가 서동진과 박명조 등이 참여하였다. 이처럼 예술적 영감을 수혈해 주는 터전이 된 상고예술학원의 존재로 인해, 문화예술 측면에서는 6·25전쟁이 완전히 잃어버린 시간만은 아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된 대구의 문화극장(옛 한일극장)

◆국립중앙극장 '문화극장'

6·25전쟁 전후기 대구는 지역 특유의 예술이 발전하고 중앙예술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한국예술의 중요 배경이 되었다. 1953년부터 대구 문화극장(현 CGV한일)이 국립중앙극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57년 국립중앙극장이 서울로 가기까지 대구의 문화예술은 진흥의 원동력을 축적하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키네마 구락부'로 불렸던 대구 문화극장은 광복 이후 최초의 연극공연이 이루어진 서구식 극장이다. 대구 문화극장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구를 비롯한 한국 공연예술 진흥의 좋은 기반이 되었다. 지역의 우수한 공연 예술가들이 문화극장에서 탄생했고, 그들이 대구와 한국 문화계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대구지역에서 6·25전쟁 전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예술 명사들이 많다. 문학계의 박목월·김동리·조지훈·유치환·이윤수·이효상·구상·이호우, 미술계의 서동균·서동진·주경·정점식, 음악계의 권태호·이점희·하대응, 무용계의 김상규·정소산, 영화계의 이규환·박남옥·조긍하 등은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를 기반으로 전국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던 대표적 예술가들이다.

왼쪽부터,전선문학,전선시첩,창공
왼쪽부터,전선문학,전선시첩,창공

◆전시(戰時) 출판문화 거점

6·25전쟁기 당시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주둔해 있었다. 이로 인해 전시상황에서 필요한 군 관련 출판물 생산·보급 활동의 거점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의 예술인들은 종군 예술인으로 활동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종군작가단에는 육군종군작가단, 공군종군문인단, 문총구국대(경북지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조직한 국군 사기앙양(士氣昻揚) 단체- 등이 있었다.

종군작가단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선 후방의 국민에게 전쟁의 실상을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전란의 시기에도 문화예술의 힘을 믿고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해왔다는 것과 이를 통해 이 땅의 문화예술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이러한 활동의 중심지가 대구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다.

육군종군작가단에서는 기관지 『전선문학』을 발행했다. 육군종군작가단 소속 문인으로는 최상덕, 김송, 최태응, 유치환, 정비석, 양명문 등이 있다. 이효상, 구상, 박두진, 조지훈, 이윤수, 이호우 등이 참여한 문총구국대(경북지대)에서는 『전선시첩』을 발간했다. 공군종군문인단에서는 기관지로 『창공』,『공군순보』 등을 발행했다. 공군종군문인단 소속 문인으로는 마해송, 조지훈, 최정희, 황순원, 김동리 등이 있다.

6·25전쟁기에는 전국의 많은 매체 또한 대구로 옮겨왔거나 대구에서 새로이 출범되기도 했다. 당시 대구의 출판사들은 다양한 잡지와 단행본 등을 출간하면서 전시 문단을 풍성하게 했다. 학원사, 동아출판사, 청구출판사, 영웅출판사, 문성당, 신태양사, 계몽사, 세광음악출판사 등과 같은 출판사들이 한국 출판산업의 태동기에 대구에서 출범하거나 성장하였다.

6·25전쟁기 많은 문학집이 대구에서 발행되었다. 종합잡지 『신태양』, 학생문예지 『학원』, 소년잡지 『소년세계』, 유치환과 김춘수, 구상 등이 참여한 『시와 시론』 창간호 등도 대구에서 발간되었다.

2024년 3월 28일 대구 중구 향촌동에 문을 연
2024년 3월 28일 대구 중구 향촌동에 문을 연 '한국전선문화관'.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몰려든 문화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통해 꽃피운 전선문화를 재조명하고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문화예술공간이다.매일신문 DB

◆한국 예술지형도 축소판 '대구'

6·25전쟁 전후기에 대구지역에서 활동한 예술인들은 고난과 시름의 산물을 남겨준 전란의 피폐함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창작열이 식지 않았다. 피난 예술인과 지역 예술인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활약한 이 시기는 대구가 한국 예술계의 중심이 되는 시기였다. 오늘날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기억들과 흔적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대구 구도심 일대에는 아직도 6·25전쟁기 당시 시·공간의 흔적들이 켜켜이 남아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은 2020년 대구시와 TBC대구방송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대구문학의 발견' 인터뷰에서 6·25전쟁 당시의 대구 위상을 이야기했는데, 그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구는 우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의식주 이상의 것을 지켜준 도시로써 영원히 남을 것이다. 6·25전쟁 때 소리 없이 사라진 예술인들의 흔적은 오늘도 대구의 구도심 거리를 걸으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2024년 3월 28일 대구 중구 향촌동에 문을 연
2024년 3월 28일 대구 중구 향촌동에 문을 연 '한국전선문화관'.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몰려든 문화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통해 꽃피운 전선문화를 재조명하고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문화예술공간이다.매일신문 DB

온 겨레가 일그러진 망국민의 신분일 때에도, 동족상잔의 크나큰 비극이 있었던 시절에도, 대구의 위대한 예술계 거장들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대구는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피난처이자 중심지가 되었고, 당시 그들이 뿌린 씨앗은 대구라는 토양을 살찌우는 기반이 되었다.

대구 향촌동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 지역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찾게 하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단순히 유명 예술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의 창작과 교류에 대한 기억과 흔적이 현재까지 오롯이 남아있어서 더 그렇다.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