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론새평-김성준] 개 흉내를 내는 늑대는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다

입력 2025-08-06 11:10:13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시오노 나나미를 유난히 좋아한다. 그녀가 정통 역사가는 아니라든지, 특정 인물과 국가에 지나치게 편향된 관점을 가졌다는 등 여기저기서 비판 목소리가 있지만 그런 건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누가 뭐래도 손꼽히는 문필가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고대 서양사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전편을 곱씹어 읽은 거의 유일한 책이다. 특히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읽고 작가가 인물에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을 쏟을 때만 누군가에 대한 전기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작가로서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개 흉내를 내는 늑대는 개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다." 그녀의 '남자들에게'라는 무겁지 않으면서 유쾌한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물론 비유한 내용과는 다르지만 이 문장과 마주쳤을 때 불현듯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념적 모호성이 떠올랐다. 아직도 대한민국에 조선시대 사상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어서인지 정치적 이념, 사상, 철학,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중도'라는 말이 어디서나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이 같이 아무 때나 사용하는 중도라는 말은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에 속하는 중용(中庸)의 왜곡된 해석에서 초래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중용(中庸)의 의미를 찾아보면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의미한다. 이 중용의 덕을 중도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우려스럽다. 본래 중도(中道)란 '사사로움이나 양극단의 한편에 치우침 없이 공정하고 명백한(公明한) 길'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중도를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이라는 말에 지나치게 꽂힌 바람에 의미의 핵심인 공명의 길, 올바른 길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길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고 다른 길은 성공과 번영으로 비상하는 길인데 어떻게 그 중간의 길을 간다는 말인가.

몰이해에서 비롯된 중도에 대한 선호는 현실 정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재명 정부는 중도·실용을 인사 기조로 삼아 통합을 꾀하고 있다는 여당의 자평이 있으며, 야당인 국힘 역시 당을 살리기 위해 '중도 쇄신'을 외치고 있다. 여야가 이처럼 중도를 지향하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무당층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특정 정당을 선호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25%로 제1야당의 지지율을 넘어서는 등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는 많은 국민들이 자신을 이념적 중도로 인식하는 경향과도 일치한다. 2024년 사회통합실태조사에서 응답자의 45.2%가 자신을 중도라 답했으며, 특히 20대(56.1%)와 30대(54%) 등 젊은 층일수록 중도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우리 정치권이 '올바른 길'보다는 당장의 인기를 따라가기 급급해 '중도'를 택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와 독재를 택한 나라는 사라지거나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본주의와 민주제를 택한 나라는 성장하고 부유하다. 정부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지고 모든 일을 계획하는 중앙집권적 경제체제는 기울어지고, 민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시장이 주도하는 자유경제체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한 인도는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도의 비극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라고 배척하고 소련식 계획경제를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는 기득권을 보호하고 기업가 정신을 파괴했다.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빈자 간의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아직도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렇게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이 되고 말았다.

중도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정치적 이념의 중도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빠지기 쉽다. 옳은 방향이 있고 가야 할 길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놔두고 중도의 길을 갈 수는 없다.